[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6) 또 다른 차원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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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때 부서져 1951년 3월 보수작업이 펼쳐지고 있는 중앙청 앞에서 국군 병사 한 명이 총을 들고 차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전쟁 중 화재로 여기저기 그을렸던 중앙청을 두고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세계적인 사진전문 잡지 라이프가 소개한 작품이다.

“자네, 저것 한 번 없애 봐-.” 이승만 대통령이 가끔씩 내게 던진 말이었다.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공병감을 맡고 있던 엄홍섭 장군이었다. 이 대통령은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이 적에게 내줬던 서울을 탈환한 뒤 엄홍섭 공병감을 불렀다.

 대통령은 엄 공병감에게 “저 중앙청 말이야, 보기가 너무 흉해. 허물어 보게”라고 지시했다. 당시 중앙청 건물은 검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적과 아군의 교전 때 생긴 화재로 여러 군데 검게 불에 그을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듬해 중공군에게 다시 서울을 내준 1·4 후퇴 때의 중앙청은 더 손상을 입었다. 부분적으로 무너지기도 했고, 불에 그을린 흔적은 더 늘었다. 엄홍섭 공병감은 1차 서울 수복 뒤에 받은 대통령의 지시를 실행할 수가 없었다.

 아울러 중공군에게 빼앗겼던 서울을 다시 찾은 뒤에도 여전히 중앙청을 허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참모총장인 나를 여러 차례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대통령은 경무대를 찾아갔던 내게도 그런 지시를 내리곤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중앙청을 빨리 허물어 보라는 얘기였다. 대통령이 중앙청을 바라보는 시각은 착잡한 것이었다. 우선은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하기 위해 세워진 상징물로서 중앙청을 보았다. 일제의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의 건물이었으니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대통령의 입장에서 중앙청이 결코 반가운 존재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북한군과 중공군의 거듭된 서울 점령 기간에 이 건물은 온갖 수난을 겪고 난 뒤였다. 이곳저곳이 부서지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검게 그을린 자국이 크게 남아 있어서 외관상으로도 결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중앙청 허무는 작업을 당시의 대한민국 군대가 해 낼 수 있느냐가 진정한 문제였다.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중앙청 허물기에 관심을 보이는 판에 직접 지시를 받았던 엄홍섭 공병감은 골치를 앓아야 했다. 거대한 화강암 석조(石造) 건물인 중앙청을 해체하고, 그 석재들을 운반해 처리하는 장비가 없었던 데다 그를 수행할 만한 실력 또한 우리에게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5년 해체공사가 시작된 옛 조선총독부(위쪽). 오른쪽은 지금의 경복궁 모습.

 솔직히 말하자면 중앙청 허물기는 함부로 마음을 내기 어려운 언감생심(焉敢生心)의 문제였다. 대통령은 재촉하고 있었지만, 그를 실행할 능력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군대가 가장 실력을 갖춘 집단이라고 했지만, 육군본부 공병감은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를 지휘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전쟁이 터지기 전 광주의 5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시급했던 것은 사병들의 사격 능력을 제고하는 일이었다. 사격장을 만들기 위해 나는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불도저를 전남 도청으로부터 한 대 빌렸다. 군대에도 지급되지 않았던 불도저는 미 군정당국이 당시 각 도청에 1~2대 정도 보내준 상태였다. 나는 그 불도저를 빌려다가 사격장 터를 겨우 닦을 수 있었다.

 불도저와 전쟁. 잘 연결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둘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군은 불도저를 사용했고, 그 적수인 일본군은 ‘모꼬’라는 것으로 그에 대응했다. 일본군의 모꼬라는 것은 일종의 들것이다. 두 사람이 막대를 어깨에 걸고 그 중간에 천조각을 받쳐 짐을 운반하는 도구다.

 미군은 태평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작은 섬에 올라 불도저로 비행장을 건설했다. 일본군은 그 반대로 자신들이 상륙한 섬에 모꼬와 수많은 병력을 동원해 비행장 만들기에 나섰다. 초반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섬 안에 공군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을 만들어내는 ‘시간의 전투’에서 졌다. 그리고 일본은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사인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불도저’, 굳이 풀어서 말하자면 건축과 토목을 책임지는 공병과 병기·통신·군수·수송 등 각 기술 분야의 병과가 갖춰야 할 막강한 실력이 당시의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저 우리에게 있었던 능력은 일본군의 ‘모꼬’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게와 그저 단순한 사람의 힘으로 중앙청을 허물 수는 없었다. 등짐으로 그 육중한 중앙청의 화강암 석재를 나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기술과 장비, 그를 치밀하게 엮어서 거대한 산을 옮기고도 남는 능력을 갖추는 일.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실력으로는 결코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난망(難望)의 목표였던 셈이다.

 ‘엔지니어 워(Engineer War)’라는 말이 있다. ‘공병전(工兵戰)’쯤으로 번역되는 미군의 용어다. 엔지니어가 동원되는 기술 분야의 전쟁을 말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벌어지는 아주 치열한 전투다. 후방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도로를 닦고, 통신선을 깔며, 부서진 교량을 재빨리 복구하며, 최전선의 진지를 적보다 한발 앞선 속도로 구축하는 일 등이 모두 그에 들어간다.

 폭파와 건설을 병행하면서 적을 타격할 수 있도록 물자와 화력 또는 병력을 후방에서 최전선으로 보내거나 다시 빼내는 전체적인 시스템을 건설해 운용하는 능력이었다. 이에서 뒤지면 결코 적을 무찌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몇 차례나 반복해 지시하는 중앙청 허물기를 수행할 능력이 우리 군에는 없었다.

 그 후방의 ‘엔지니어 워’는 미군의 힘에 의존해 간신히 해결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중앙청 허물기는 대통령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40여 년이 흘러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중앙청은 급기야 해체됐다. 모 대기업 건설사가 그 작업을 맡아 수월하게 허물었다. 그러나 출범 뒤 바로 전쟁을 겪어야 했던 신생 대한민국에는 그런 힘이 없었다. 후방에서 벌어지는 시스템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군의 실력을 일본군의 ‘모꼬’ 수준에서 미군의 ‘불도저’로 끌어올리는 게 절박한 과제였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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