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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린 vs 오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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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종종 ‘자학(自虐) 개그’로 사람들을 웃겼다. 배우 시절 침팬지와 찍은 사진을 두곤 “시계 찬 쪽이 바로 나”라고 우스개를 했다. 둘 다 지적 수준은 매한가지란 소리다. 실제로 그는 ‘공부하는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었다. 1983년 서방 7개국(G7) 정상회담이 코앞에 닥쳐도 참모들이 준비한 자료를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질책하는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에게 변명하길 “어젯밤 TV에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하지 뭔가.”

 그럼에도 ‘위대한 소통자’로 추앙받는 걸 보면 지성과 리더십은 별개인 것일까. 이번 미국 중간선거에서도 비슷한 화두를 던진 인물이 있다. ‘티 파티(Tea Party·극우 보수 유권자 모임)의 대모’를 자처한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다. 그가 민 후보들이 상·하원 의원과 주지사로 대거 당선되며 2012년 대선 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 1순위로 등극했다.

 예상 밖 선전(善戰)에 진보·보수 막론하고 당혹감을 나타냈다. 유세 중 드러난 그녀의 지나친 무지 때문이다. ‘refudiate 사건’이 대표적이다.

뉴욕 내 이슬람 사원 건립에 반대하는 트위터 메시지에 ‘refute(반박하다)’도 ‘repudiate(거부하다)’도 아닌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들이댔다. “공화당은 이민자들에게 영어 배우라고 주장하기 전에 페일린 공부 좀 시켜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기죽지 않고 맞섰다. “영어는 살아있다. 셰익스피어도 새로운 말을 즐겨 만들지 않았나.”

 페일린은 미국이 특별한 나라라는 이른바 ‘미국 예외주의’를 신봉하면서도 미국의 지도자는 특별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결코 일반 국민과 달라선 안 된단 것이다. 무식해도 당당한 이유다. 힐러리 클린턴처럼 남자 경쟁자보다 두 배는 뛰어나려 용썼던 게 앞 세대 여전사들. 이와 달리 평범한 아줌마로 자처하는 그녀를 두고 ‘페미니즘의 종언’이란 얘기도 나온다.

 어쩌면 진짜 영리한 건 페일린일지 모른다. “미국인들은 생각이 너무 많은 대통령을 원치 않는다.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아버지 타입도 질색이다”(클로테르 라파이유, 『컬처 코드』). 아이비 리그 출신에다 입만 열면 “한국을 배우라”며 잔소리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궁지에 몰릴 만하지 않은가. 차기를 노린다면 잊지 마시길. 민심을 움직이는 건 논리가 아니라 감정 아닐까.

신예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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