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윤이상] 上. 왜 지금 윤이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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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 1994년 봄 베를린 근교의 자택 정원에서 포즈를 취한 윤이상씨. 그는 정원 한 모퉁이에 한반도 모양의 작은 연못을 만든 후 한국에서 가져온 대나무·연꽃을 심어 놓고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했다.

고 윤이상 선생의 살던 집은 독일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30㎞ 떨어진 클라도의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달 기자가 방문했을 때 윤씨의 집은 비어 있었다. 부인 이수자 여사가 평양에 체류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들 우경(51)씨는 미국 LA에서, 딸 정(55)씨는 베를린과 뉴욕.서울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자택에서 북쪽으로 7㎞가량 떨어진 가토 지역 공동묘지에 자리한 윤이상의 묘비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도 더럽혀지지 않고 항상 깨끗하다'는 의미다. 베를린에는 '국제윤이상협회'가 있다. 회원은 70여명으로 대부분 연주자다. 이 협회의 볼프강 슈파러(음악평론가.사진) 회장을 만났다.

-국제윤이상협회는 어떤 단체인가.

"윤이상의 곡은 어렵지만 한번 연주하면 매혹된다. 그래서 그가 타계한 뒤 그의 음악을 더 연구하려고 자발적으로 협회를 만들었다."

-당신이 본 윤이상의 성품은.

"나는 1981년 윤이상의 음악을 취재하면서 친해지게 됐다.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말은 직선적이었다. 청년 때는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도교에 관심을 갖다가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했다."

-윤이상씨와 북한의 인연에 대해 얘기해 달라.

"그는 63년에 북한을 처음 방문했다. 남한의 지인이 이산가족을 찾고 싶다는 부탁을 해와 방문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북에 편향되지 않았다. 북한과 접촉이 잦아진 것은 동백림 사건 이후다. 그는 '북한에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것이 내 임무'라거나 '나는 정치적인 음악가가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북을 도우려 했지만 정신적으로 종속되지는 않았다. '남한은 독재이지만 북한은 전체주의'라고 평가한 적도 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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