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는 북한 핵 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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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외무성의 핵무기 보유 선언 나흘 뒤인 지난 14일 핵무기 존재를 부인하는 내용을 방송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보도는 외무성 성명이 발표된 것과 같은 관영 중앙방송(라디오)을 통해 이뤄졌다.

본지가 17일 입수한 중앙방송 녹취록에 따르면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先軍)정치를 찬양하는 보도에서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략전쟁에서의 승리에 도취한 미국은 저들이 악의 축으로 제정한 우리 공화국을 다음 공격 목표로 정하고 우리에 있지도 않은 핵 및 미사일 위협설을 내돌리면서 반공화국 제재와 압력소동에 광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우리 공화국에 대한 미제의 날로 더욱 노골화되는 압살정책으로 해서 조선반도에는 전쟁의 구름이 짙게 드리웠다"고 주장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 고립.압살 정책에 맞서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한 10일자 외무성 성명과 배치된다. 그러나 북한은 이후 평양방송 등을 통해 외무성 성명에 대한 중국 신화통신 등 외신 반응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한 데 대해서 외국 언론들이 썼다"고 전했다.

또 "남조선의 미군철수국민운동본부가 이북의 핵무기 보유는 주권국의 당연한 자위적 조치라고 논평했다"(2월 14일.중앙방송)고 보도하는 등 핵무기 보유와 관련해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부 당국은 일단 북한이 외무성 성명을 통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만큼 이를 북한의 공식 입장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북한 관영매체들이 핵무기 보유에 대해 혼선을 빚고 있는 배경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핵 문제에 대한 북한 권력 내부의 입장 조율에 문제가 생겼을 수 있다는 분석까지 제기한다. 하지만 외무성 성명과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3회 생일을 전후해 북한 내부에 이상징후가 감지된 것은 없다는 게 관계 당국의 판단이다. 북핵 전문가인 전봉근 평화협력원장은 "언론매체에 대한 북한 당국의 통제와 검열은 상상을 초월한다"며 "핵무기 보유라는 폭탄선언을 내놓은 뒤에는 당연히 보도 가이드라인이 뒤따랐을 텐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전 원장은 "외무성과 관영매체 사이의 의사소통 문제로 빚어진 사태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북한이 성명 내용 중 무게를 뒀던 6자회담 불참보다 핵무기 보유가 지나치게 크게 부각되자 이를 조정하기 위한 보도를 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 언론의 엇박자는 핵무기 보유선언을 우리 정부가 지나치게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거기에 깔린 외교적 전술을 깊이 읽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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