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도산법 또 무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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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도산법으로 불리는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의 국회 처리가 늦어지고 있다. 이 법안은 신용불량자를 효과적으로 빠르게 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민생법이다. 여야와 정부 모두 빨리 입법해야 한다고 공감하고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지도부는 대표 연설과 정책협의회 등에서 2월 임시국회에서 통합도산법을 처리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구체적인 법안 내용에 대해서도 여야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지난해 11월 국회에 제출된 법안을 여야가 충분히 의논해 다듬었다.

그러나 16일 국회 법사위 소속 한 의원은 "이번 국회에서 통합도산법이 통과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국회 관계자는 "몇가지 남은 쟁점 가운데 법무부와 대법원의 의견 대립이 가장 큰 골칫거리"라고 털어놨다. 통합도산법에 따라 신설될 '개인채무조정위원회'를 누가 관할하느냐를 놓고 벌이는 두 기관의 힘겨루기가 법안 처리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통합도산법은 정기적 수입이 있는 개인 채무자가 파산절차를 밟지 않고도 채무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파산선고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이때 채무를 조정할 조정위원회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위원회의 조정은 재판상의 화해와 같은 효력을 갖도록 했다. 상당한 권한을 갖게 되는 새 기구다.

정부는 국회에 제출한 법안에서 이 위원회를 법무부 장관 밑에 두도록 했다. 20명의 조정위원 임명권도 장관에게 줬다. 법무부가 법령의 제.개정권을 갖고 있으니 변화하는 현실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다. 환경분쟁조정위원회를 환경부 산하에 두는 것처럼 통상의 법률방식에도 맞다는 설명이다.

그러자 법원행정처는 최근 국회에 자료를 제출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전국에 1개의 위원회만 둬서는 서면심사 위주의 부실한 조정밖에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지 못해서는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을 갖는 '통상의 조정'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전국 14개 지방법원 본원에 조정위원회를 설치해 국민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에서도 개인채무조정사건을 법원이 담당하고 있다는 사례도 들었다.

이렇게 두 기관이 팽팽히 대립하자 일부 법사위원은 "차라리 금감위에 맡기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내놨다. 금감위는 지난 14일 국회 법사위원에게 제출한 답변서에서 "금융채무 외에 사채 등 모든 채무가 조정대상이므로 법무부 또는 법원에서 운영하는 것이 타당하다"면서도 "두 기관의 동의하에 금감위 내에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두 기관이 합의하지 못하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국회 관계자는 "법 통과가 시급한 상황에서 일이 점점 더 복잡하게 꼬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 법사위는 21일 소위를 열어 관련 기관의 의견을 들을 예정이지만 쉽게 결론을 내기가 어려울 전망이다.

입법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현행법에 따른 개인 파산신청자는 크게 늘어나고 있다. 대법원 집계에 따르면 2004년 전국 법원이 접수한 개인파산 신청 건수는 모두 1만2373건으로 전년도(3856건)의 세배를 넘었다. 회생절차를 신속히 진행할 수 있도록 한 통합도산법안을 마련해놓고도 정부기관의 힘겨루기 때문에 그보다 불리한 현행법에 의한 심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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