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억류한 대통령, 군이 구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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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에서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정부의 복지혜택 축소에 반발한 경찰 폭동이 발생, 라파엘 코레아(47) 대통령이 하루 종일 억류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코레아는 군 병력에 의해 구출됐지만, 군·경 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AP통신 등이 전했다. 에콰도르 정부는 이날 계엄을 선포하고 군에 치안을 맡겼다.

방독면을 쓴 에콰도르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시위 경찰에 의해 억류돼 있던 경찰 병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에콰도르 경찰들은 자신들의 복지 혜택을 줄이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이날 폭동을 일으켰다. [키토 AP=연합뉴스]

폭동은 공무원 복지혜택 축소 법안이 전날 의회를 통과하며 촉발됐다. 법안은 군·경 진급 때마다 훈장과 보너스를 지급해온 관행을 중단하도록 했다. 진급에 필요한 평균 근무 연한도 5년에서 7년으로 늘렸다.

이 소식을 접한 경찰들은 지난달 30일 아침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도 키토에서만 8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들은 정부 건물을 점거하고 의사당에 난입했다. 과야킬·쿠엥카 등 지방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타이어를 불태우며 고속도로를 차단하기도 했다. 군 일부도 시위에 동조했다. 공군 병력이 키토의 국제공항 활주로를 점거해 항공기 이착륙이 전면 중단됐다.

경찰들의 시위로 치안 공백이 발생하자 약탈 등 범죄도 잇따랐다. 키토에서만 최소한 은행 두 곳이 털렸다. 이 때문에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았고 학교도 휴교에 들어갔다.

코레아 대통령은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경찰이 점거 중인 숙소로 찾아가 복지혜택 축소 강행 의사를 밝혔다. 그는 셔츠를 풀어 젖히며 “대통령을 죽이고 싶다면 여기 있다. 용기가 있거든 죽여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의 발언에 흥분한 시위대가 몰려들면서 육박전이 벌어졌다. 경찰들은 대통령의 몸을 떠밀고 물을 뿌렸다. 지척에서 최루탄까지 터지자, 코레아는 방독 마스크를 쓴 채 황급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시위 경찰들은 코레아가 치료를 위해 찾아간 경찰병원까지 쫓아가 건물을 포위했다. 대통령 억류 사태는 12시간 동안이나 지속됐다. 결국 군은 자동소총 등으로 시위대를 공격, 코레아를 구출했다. 정부는 35분간의 총격전으로 군인 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지만, 에콰도르 적십자는 “2명이 죽고 37명이 다쳤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정부는 시위대와 대통령 지지 세력의 충돌로 최소 1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고 발표했지만, 적십자 측은 “부상자가 5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밤늦게 대통령궁에 도착한 코레아는 이날 폭동을 자신을 축출하기 위한 시도로 규정했다. 그는 “시민의 옷을 입은 다수 잠입자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특정 배후를 지목하진 않았다.

코레아는 미국에서 공부한 좌파 경제학자 출신이다. 2006년 대선에서 친미 성향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고, 지난해 재선에 성공했다. 중남미 5위의 산유국인 에콰도르의 석유 자원 국유화를 추진, ‘제2의 차베스’ ‘민족주의적 포퓰리스트’란 평가를 받아왔다. 같은 좌파 성향의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에콰도르 사태를 논의하기 위한 남미국가연합(UNASUR) 긴급 회의를 1일 아르헨티나에서 열자고 제안했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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