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9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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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명상에 대해서 말로 설명하는 것이 가당치 않기는 하나 밖으로는 떠들썩하게 장광설과 재담을 지껄이고 전혀 심사숙고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잠시도 한 가지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는 듯한 행동을 보이면서도 나는 어릴 적부터 혼자 있을 때가 제일 좋았다. 처음 만나는 친구마다 내가 혼자 진득하게 앉아서 뭔가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모양이어서 나중에 '감쪽같이 속았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 어떤 여자는 '뭐야, 권투선수 같잖아'라거나 '책을 읽기는 하는 거예요?' 하는 식의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또는 외모와 글이 왜 그렇게 다른 거냐고 묻기도 했다. 그 무렵에 나를 '십일면관음'이라고 놀렸던 철학도 우석이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원 벽에 뭐라고 써있었는 줄 아니? 판 신에게 드리는 기도라고 해놓고, 나의 내면과 외면이 일치되게 해주소서, 그랬다더라.

동굴 위의 바위에 올라앉아서 결가부좌하고 있으면 처음에는 주변에서 들리는 밤새 소리나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는 바람소리까지 들려오지만, 차츰 호흡이 깊어지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몸이 내 껍질처럼 느껴지고 눈 구멍 안쪽의 자아가 외계를 내다보고 있는 게 확연해진다. 시간이 지나가면 이쪽이 무릎 부근 저만치에 놓여있는 저쪽 돌멩이나 다름없어진다. 나는 나중에 나이 들어 감옥 독방에서 오년을 보내면서 곧잘 이걸로 버티었는데 시간에서 벗어나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최근까지도 누구에게서 소개를 받아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아마 직접 만나면 아주 놀랄 거라'는 주의를 받고 오는 경우가 많다. 왜냐고 물으면 '생각하던 것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건 청소년기부터 재담과 광대 짓의 뒤로 숨으려던 태도에서도 비롯되었겠지만 다른 원인도 있을 것이다. 내 친구들은 어려서부터 경쟁 속에서 갈고 닦은 도회지의 뺀질이답게 절대로 자기 속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책을 읽고서도 그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놓거나 인용하는 짓을 가장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택이가 니체의 산문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그대로 내뱉었다가 상득이 성진이 우석이 등에게서 차례로 박살이 났다.

- 넌 그걸 육십년대 군사정권 아래서 한국어로 읽었단 말이지. 네가 읽은 말이 생소하냐, 익숙하냐? 네 꼴을 한번 돌아봐라.

- 야야 이 머리 나쁜 돼지야, 그러니까 네 모든 행동이 천박해 보이는 거야. 너 동굴 올라올 생각도 여기서 보고 흉내낸 거지?

- 신이 죽든 살든 네가 지닌 풍속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우석이는 그의 '대가리'를 수없이 쥐어박았다.

- 네 생각만큼만 행동하거라, 이 천박한 놈아.

나는 친구들의 택이에 대한 질책이 옳다고 믿는다. 자식, 니체를 직접 얘기하지 말고 그런 느낌이 드는 고목나무에 대해 얘기하려고 애썼으면 좋았을 텐데.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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