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는 영토, 미국과는 환율 … 중국 ‘2개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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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고집부리면 더 강도 높은 조치
원자바오, 억류된 선장 즉각 석방 촉구”

중·일 ‘센카쿠 갈등’ 확산

힘을 키우려면 마찰이 불가피한 것일까. 중국이 일본·미국에 날을 세우고 있다. 일본과는 센카쿠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과는 한동안 가라앉았던 환율 문제가 다시 갈등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특히 미국 의회가 환율을 조작했다는 이유로 중국을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의 표결을 결정하면서 미·중 간의 환율전쟁이 심상치 않은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중국이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尖閣) 열도) 영유권 갈등과 관련해 일본에 대한 전방위 압박에 나서고 있다.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인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21일(현지시간) 일본을 겨냥, 구속된 중국인 잔치슝(詹其雄·41) 선장을 “무조건 즉각 석방하라”라고 압박했다. 또 “일본이 고집을 부리면 중국은 더 강도 높은 행동을 취할 것이고 그 대가는 일본이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을 겨냥한 중국의 실력 행사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은 “베이징시 관광당국이 21일 중국 여행사 관계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일본 여행객을 모집하는 광고나 선전을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일본 여행을 금지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일본 여행 자제’를 요구한 것이다. 중국 외교부 장위(姜瑜) 대변인도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중국 여행객은 안전하고 쾌적한 장소를 골라 여행할 것”이라고 말해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이 방문 기피 대상이 될 것임을 암시했다. 실제로 중국의 유명 건강용품 제조업체인 바오젠(寶健)은 17일 댜오위다오 갈등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직원 1만 명의 일본 관광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중국이 일본에 대한 압박 수단의 일환으로 자국이 독점하고 있는 전략광물 희토류(稀土類)의 대일본 수출을 중단할 것이란 소문도 퍼지고 있다. 미 뉴욕 타임스(NYT)는 23일 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중국 세관이 희토류 제품의 일본행 선적을 막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상무부 대변인이 나서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긴 했지만, 업계에선 “예전부터 소문이 파다했다”는 반응이다.

중국의 거센 압박에 일본 정부도 당황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일 댜오위다오 인근 해상에서 자국 순시선과 충돌한 중국 어선을 나포, 선원 15명을 체포한 뒤 13일 이 중 14명을 석방하면서도 잔 선장만은 계속 억류해왔다. 그 배경에는 중국 측 반발이 몇 차례 시위와 주중 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하는 수준에서 끝날 것이란 판단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관광 제한 등 예상 밖의 강경책을 취하자 일본 정부는 난감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잔 선장을 쉽게 석방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만약 그를 명분 없이 석방할 경우 국내 강경파들이 거세게 반발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위안화 저평가 계속 땐 상계관세 부과”
미 하원 세입위, 제재 법안 표결 추진

미·중 ‘위안화 갈등’ 심화

미국 의회가 중국의 위안화 절상을 압박하기 위한 무력시위에 나설 채비다. 미국과 중국 간의 환율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하원 세입위원회는 24일(이하 현지시간) ‘공정무역을 위한 환율개혁법안’에 대한 표결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 법안은 중국의 위안화 저평가 정책을 수출보조금으로 간주하고, 중국 제품에 대한 상계관세를 상무부가 부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내용이다. 사실상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인식하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겠다는 것이다.

법안이 하원 세입위를 통과할 경우 다음 주 중 하원 본회의에서 표결이 이뤄지게 된다. 법안은 하원의원 435명 중 민주·공화 양당 의원 133명이 공동 발의했기 때문에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22일 성명에서 “미국 기업과 근로자들이 좀 더 공정한 경쟁의 장을 갖도록 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와의 협상에서 교섭력을 높일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킬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또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도 이날 하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위안화가 상당히 저평가돼 있다”며 “현재의 위안화 수준은 미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일 CNBC가 생중계한 ‘국민과의 대화’에서 “위안화 가치는 시장의 평가보다 낮게 반영돼 있다”며 “중국은 이론상으로는 위안화 절상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실제적으론 절상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3일 오전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 중인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도 위안화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전해졌다. 7월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262억 달러로 2008년 10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중국의 양보를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원자바오 총리는 “위안화 가치를 급속하게 높일 근거가 전혀 없다”며 기존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원 총리는 22일 미국 재계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지난 6월 19일 이후 변동폭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환율 개혁을 시작했지만 급속한 절상은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중국은 미국·유럽엔 무역흑자를 보고 있지만 한국·일본과는 적자를 보고 있다”며 “미·중 간 무역 불균형은 환율로 인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이 겉으로는 위안화 절상 압력에 반대하는 공식 입장을 지키면서 실무적으로는 위안화를 소폭 절상하는 행보에 나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인 21일엔 기준환율을 달러당 6.6997위안으로 고시했다. 1994년 이후 처음으로 달러당 6.7위안 선을 넘었다. 이달 들어 이틀만 빼고 위안화 가치는 계속 올라 상승률이 1.6%에 달한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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