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웠던 ‘그때 그 추석’이 현재가 되려면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관련사진

photo

추석이다. 아련한 추억 속의 추석, 모든 것이 넉넉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추석이 돼야 새 옷을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었고 고기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다림과 설렘이 있었고 가족 간에 웃음도 넘쳤다. 하지만 자가용을 타고 고향을 찾을 수 있을 만큼 부유해진 요즘 추석은 예전 같지 않다. 조금 긴 연휴 정도일 뿐 귀성 전쟁이다, 명절 증후군이다 해서 추석이 반갑지 않은 사람도 많다. 또 추석이 끝나고 나면 가족 상담이 증가하고 이혼이 는다니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미리 계획하고 가족만의 작은 행사 준비
그러면 모두가 즐거운 추석, 가족관계가 더 돈독해지는 추석을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가위 특별기고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장

먼저 평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 나가야 한다. 추석에 가족과 친척이 모이기만 하면 즐거운 것이 아니고 행복한 가정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집은 잠이나 자는 공간이라면 가족 간의 즐거운 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맞벌이하는 부부라면 부부가 대화하는 시간조차 내기 어렵고 아이들은 나름대로 학원이다 과외다 해서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하더라도 따로 시간을 내 함께 식사하며 대화하고 TV나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면서 가족 간의 친밀감을 쌓아 나가야 한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동호회를 결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가족이 동호회가 돼 같은 취미를 즐길 수도 있다. 즐거운 시간을 통해 쌓인 친밀감과 응집력은 위기나 갈등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가족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갈등은 그때 그때 푸는 것이 좋다. 행복한 가족이라고 갈등이 전혀 없거나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문제와 갈등이 있지만 대화로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해 나갈 줄 알아야 행복한 가족이다. 앙금과 갈등이 풀리지도 않은 채 만나면 아무리 가족이고 추석이라 해도 즐거울 수만은 없다. 왜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하느냐고 따지지 말고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 보자.
아랫사람이 먼저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권위의식을 내세우지 말고 윗사람이 먼저 연락한다면 갈등이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그리고 화해하자고 내미는 손은 조건 없이 잡아주어야 한다. 화해하자고 내미는 손을 야멸치게 뿌리친 결과 깨어지는 가족을 많이 보아서 하는 소리다.

셋째, 추석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미리 계획하자. 음식 장만이나 선물 준비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추석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창의적 계획을 짜 보는 것도 중요한 준비다. 만나서 식사하고 TV만 보다가 헤어지는 늘 그런 추석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그때 그 추석’을 위해 부부가 머리를 맞대 보자.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사진을 각자 가지고 와 추억의 조각들을 맞추어 보는 것도 재미있다. 한껏 멋을 낸다고 냈지만 참 촌스러웠던 그 시절의 아빠나 엄마를 보고 배꼽 잡기도 하고 젊은 시절 할아버지·할머니가 탤런트 뺨칠 만큼 ‘얼짱’이어서 감탄할 수도 있다. 코 흘리고 오줌 싸던 어린 시절 추억담을 나누며 가난했던 그 시절을 딛고 우리가 지금 얼마나 풍족하게 사는지 돌아보면 모두가 부자가 된 듯한 뿌듯함에 한없이 행복해질 것이다.

■ 즐거운 추석을 위한 열 가지 다짐

1. 추석을 어떻게 보낼지 미리 계획하자.
2. 과거의 앙금은 미리 풀고 가자.
3. 음식은 간소하게 준비하자.
4. 남자 일, 여자 일로 나누지 말고 함께 일하고 함께 쉬자.
5. 예민한 주제(결혼, 취업, 입시, 비교…)는 조심하자.
6. 인사로 건넨 얘기에 과민하게 반응하지 말자.
7. 친정에 가는 며느리를 시부모가 먼저 배려하자.
8. 부부는 한 팀임을 잊지 말자.
9. 감사도 내가 먼저, 사과도 내가 먼저 하자.
10. 우리 가족만의 추석 문화를 창조하자.

관련사진

photo

추석에 온 가족이 모여 벌초하고 있다.

고향으로 가는 길고 긴 차 안에서의 시간이 단순히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만은 아니다. 좁은 공간에서 우리 가족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의외로 큰 수확을 얻을 수도 있다. 자녀의 나이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각자가 좋아하는 CD 한 장씩 준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의 해설까지 곁들이는 시간을 가진다면 두세 시간짜리 훌륭한 콘서트가 된다. 가수 이름과 노래 제목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자녀들의 애창곡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무조건 싫어했던 엄마·아빠의 애청곡 속에서도 가슴 울리는 서정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각자 음식 가져와 나눠 먹으면 어떨까?
추석 전에 다져야 할 가족관계와 계획해야 할 사항 외에 추석을 맞아서는 또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

첫째, 무엇보다 음식을 간소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 예전처럼 못 먹고 못 입던 가난한 시절이 아니니 바리바리 싸줄 음식까지 준비하느라 고생을 키울 필요는 없다. 부모님이 잔뜩 싸주시는 음식을 거절하지 못하고 가져왔다가 몰래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면 더욱더 음식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 명절 음식을 정성 들여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 생전 부모님이 즐겨 잡수시던 음식으로 형편 따라 차례 음식을 준비하는 융통성이 필요하다. 아니면 각자 한두 가지씩 만들어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품평회를 열어 보는 것은 어떨까?

둘째, 음식을 준비하고 상 차리고 설거지하느라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변해야 한다. 남편의 따뜻한 감사와 위로의 말 한마디만 있어도 아내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억울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을 차리고 치우는 일만이라도 남편과 아이들이 거들어준다면 아내의 수고를 크게 덜 수 있다.

이제 돈도 남녀가 함께 버는 세상이 되었으니 집안일도 함께해야 한다고 집안의 남자 어른이 먼저 팔을 걷어붙인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여성도 “왜 남자는 손도 까딱 안 하고 앉아서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고 비난하지 말고 왜 한국 남성이 집안일을 안 도와주고 못 도와주는지 되돌아보자.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아들이나 동생을 편드는 말이 아니라 아내가 남편을 두둔하는 얘기라면 더욱 효과 만점이다. 집안일은 여자나 하는 일이라고 남자는 배웠고 아버님이 어머님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컸으며 집안일을 안 해 봤으니 더욱더 서툴 수밖에 없지 않냐고….

게다가 그런 남자들을 우습게 보는 사회의 눈초리와 일만 강조하는 기업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남편만 나무랄 순 없다고 한마디 한다면 남편이 스스로 부엌으로 달려가지 않을까?

어떤 남성은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해주면 집안일은 당연히 여자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노후와 자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라도 분담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집에서 모든 것을 아내에게 의존하다 보면 노년기에 남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게다가 아내가 먼저 세상이라도 떠나면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자칫 자식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아버지를 서른 가까이 보아온 아들이 결혼한 뒤 가사 분담 문제로 다투다가 부부 사이에 금이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 가족과 친척이 다 모이는 추석에는 말조심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예민할 수 있는 결혼이나 취직, 입시 같은 얘기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얘기도 삼가는 것이 좋다.
골프를 치고 싶지만 칠 형편이 못 되는 친척 앞에서 지나치게 골프 얘기만 한다든지, 대학에 못 간 친척들도 있는데 외국에서 유학했던 얘기만 늘어놓으면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특히 경제적 형편이 비교되는 얘기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반면 인사로 건넨 한마디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태도 또한 반성할 필요가 있다. 집안 어른이 인사말로 건네는 한마디가 부담스러워 친척이 모이는 자리에 아예 가지도 않으려는 자녀가 있다면 무조건 야단만 칠 것이 아니라 슬기롭게 대응하는 지혜를 부모가 가르쳐야 한다. 아니면 가족에게 그런 화제는 좀 삼가 달라는 부탁을 미리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넷째, 친정에 가야 할 며느리를 시부모가 먼저 배려해 주자. 내 소중한 딸도 누군가의 며느리라고 생각한다면 말도 못 하고 속만 끓이는 며느리를 시부모가 먼저 챙겨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부모님의 처분만 기다리지 말고 아내 입장과 심정을 헤아려 몇 시쯤에는 출발해야겠다고 남편이 먼저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연휴가 짧아 양가를 다 방문하기가 어렵다면 추석이나 설 전에 장인·장모님을 찾아뵐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하는 것도 아내를 위하는 길이고 사위의 도리다.

다섯째, 이번 추석에는 우리 가족만의 독특한 가족의례를 한번 만들어 보자. 사소한 것이지만 매년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리만의 가족의례로 자리 잡게 된다. 함께 하고 몰입할 수 있는 가족의례는 가족 공동의 유대감과 가족문화를 유지시켜주는 필수적 요소인데 가족 간 합의로 결정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어도 좋다.

예를 들면 사진관에 갈 필요도 없이 디지털 카메라로 모든 것을 편리하게 담을 수 있게 된 요즘, 매년 가족사진을 한 장씩 남기는 것도 훌륭한 가족의례가 될 수 있다. 한두 장의 가족사진이 예닐곱 장이 되고 다시 십 수 장이 모이다 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된다. 취향이 비슷해 다들 합의만 할 수 있다면 가족이 다 함께 노래방에 가 부부 대항 노래자랑을 펼치거나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다.
 
부부 팀워크로 난관 이겨내야
그리고 무엇보다 부부는 한 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하는 그 누구나 무엇 앞에서도 부부가 한 팀이 되어 똘똘 뭉치면 그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음을 명심했으면 한다.
이제 곧 누군가의 며느리나 사위가 될 자녀가 있다면 우리 가족만의 오붓한 추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이번 추석보다 더 즐겁고 뜻깊은 설과 추석을 내년에 맞이하고 싶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내와 남편에게 감사와 위로의 얘기를 먼저 건네 보자.

표현하지 않고 전달되지 않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고 쑥스러워도 기뻐하는 아내와 남편을 보면 망설일 일이 아니다. 이제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가족 모두가 즐거운 추석을 만들기 위해 내가 먼저 배려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부부가 되어야겠다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장

가족학 박사인 필자는 대교출판과 대교의 대표이사.
건강가족실천운동본부 총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가정경영연구소장과 한국사이버대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대기업을 대상으로 600여 회 강연했으며 KBS, SBS, EBS에 가정경영 전문가로 고정출연하고 있다.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