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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미래세대를 위한 세상사 편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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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명품을 뒤집어쓰고 다닌다고 사람이 명품이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명품이면 아무거나 걸쳐도 다 명품처럼 보이는 거지요. 명품이 아닌 사람들이 꼭 명품 타령을 합니다. 명품 아닌 사람이 명품으로 쳐 바르고 다니는 것만큼 애처로운 게 없습니다. 사람은 안 보이고 오직 명품만 보일 테니까요. 명품을 탐하지 말고, 스스로 명품이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돈 안 들이고도 멋 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이 땅 최고의 ‘명품남’을 소개하겠습니다. 얼마 전부터 광화문광장에 앉아계신 분입니다. 세종대왕이시지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친아’ 아닙니까? 반만 년 두께의 장구한 우리 역사 속에 훌륭한 인물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마는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꼽으라 한다면 주저없이 세종대왕을 들겠습니다. 한글을 만든 공로 때문만이 아닙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명나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사대외교를 펼치면서도 나라의 주권과 민족적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현실감각을 발휘한 지도자였습니다. 문치(文治)를 강조하면서도 결코 문약(文弱)에 빠지지 않는 균형감각도 갖고 계셨지요. 이를 바탕으로 조선 500년이라는 세계사 속에서도 보기 힘든 장수 왕조의 기틀을 세웠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최고의 성군(聖君)이자 현군(賢君)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그렇게 뛰어난 임금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세종대왕을 명품으로 만들어준 토대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책입니다. 어릴 때부터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습니다.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백 번을 채웠고, 몸이 아파도 글읽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세자 시절 하루는 병이 들었는데도 글 읽는 소리를 들은 아버지 태종이 세자의 방에서 책을 모조리 거둬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낙심한 세자는 병풍 사이에 끼어 있던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을 1000번이나 읽어 아예 외어버렸다지요.

세종이 원래 자기 차지가 아니었던 왕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책을 읽고 학문을 갈고닦은 이유 말고 다른 게 아닙니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세자한 뒤 양녕의 장남에게 왕위를 넘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지요. 그러자 태종은 신하들에게 “어진 이를 가리어 아뢰라”고 명합니다. 몇 차례 채근에도 신하들이 감히 언급하지 못하자 태종이 말합니다. “충녕대군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고, 또 국가에 큰일이 생겼을 때 범상치 않은 견해가 있으니 내 이제 충녕으로 세자를 삼고자 하노라.” 신하들은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어진 이를 골라야 한다는 신들의 말씀도 역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이옵니다.”

세종은 고전 속에서 군왕이 걸어야 할 길을 터득했습니다. 세종의 사랑을 받던 어린 후궁이 있었습니다. 그러데 어느 날 그 후궁이 세종의 총애를 믿고 작은 부탁을 했습니다. 세종은 그 자리에서 그 후궁과 인연을 끊고 대전 상궁에게 일렀습니다. “어린 것이 감히 청을 넣다니, 이는 과인이 지나친 사랑을 보여서다. 어림에도 이러니 성숙하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하겠다. 물리칠 것이니라.” 찬바람 소리가 쌩쌩 나지요? 지나쳐 보일 수 있어도 화근을 미리 제거하는 현명함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사소한 작은 부탁이 인사 청탁처럼 국가를 뒤흔들 폐습으로 발전한다는 걸 일찌감치 책을 읽고 배웠던 거지요.

그런 세종의 학문은 신하들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낡은 풍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그들을 개혁의 길로 이끌 수 있었던 거지요. 우리 글 훈민정음도 그래서 가능했고요. 세종이 한글 사용에 반대하는 최만리를 꾸짖는 부분은 실록 중에서 제가 가장 통쾌하게 생각하는 장면입니다.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어언무미(語言無味)라 했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말도 맛이 없다는 뜻입니다. 읽으세요. 좋은 책 100권만 읽어도 어느새 명품이 돼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세종처럼 말이지요.

중앙일보 j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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