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 빅3’ 나고야 설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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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고야행 비행기 안=너무 먼 6m

9일 오전 일본 나고야행 아시아나 OZ122편 비즈니스 클래스의 2열. 오른쪽부터 라응찬 회장, 이백순 행장, 본지 한애란 기자, 위성호 부사장, 신상훈 사장. [김회룡 기자]

오전 9시15분 일본 나고야로 향하는 아시아나 OZ122편. 15석의 비즈니스클래스 중 가장 로열석으로 꼽히는 2열 왼쪽 창가인 A석은 라응찬 회장의 몫이었다. 그 바로 옆자리에 이백순 신한은행장이 앉았다. 반대편 창가 자리인 2G석엔 신상훈 신한지주 사장이 앉았다. 기자는 두 사람의 사이인 2열 C석을 예약했다. 28년간 동지였던 라 회장과 신 사장은 그렇게 기자를 사이에 둔 채 떨어져 앉았다. 비행기 좌석 간 거리는 6m 정도에 불과했지만 벌어진 그들의 사이만큼이나 멀어 보였다.

라 회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은행에서 미리 준비한 설명자료를 들여다봤다. 그는 기내에서 기자들의 질문에는 응하지 않았다. 기내식은 사양하고 물만 여러 잔 마셨다. 라 회장은 옆자리의 이 행장과는 간간이 말을 주고받았다. 이 눈길은 오른쪽에 있는 신 사장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신 사장은 바로 잠을 청했다. 결백을 해명해야 할 입장이지만 따로 자료를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혐의가 없으니 설명자료를 준비할 것도 없다”고 했다. 나고야공항에 내린 뒤엔 기자들에게 “이건 조직 대 개인의 (싸움) 형태”라고 말했다.

# 나고야 메리어트호텔=고성 터져

나고야 메리어트호텔 16층 연회장 ‘타워즈 볼룸’. 머리가 희끗희끗한 27명의 원로주주가 모였다. 신한은행 측은 신 사장의 비리 혐의를 보여주는 파워포인트 설명자료를 미리 준비해 왔다. 라 회장은 원로주주들 사이에, 이 행장과 신 사장은 그 뒤편에 앉았다. 다만 나란히 앉지 않고 한 자리를 비워두고 따로 앉았다.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됐다. 닫힌 회의장 문 바깥으로는 종종 고성이 새 나왔다. 재일동포 주주들의 격한 목소리였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설명회는 신한 측 인사와 주주들이 한 명씩 나와 발표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동시통역기를 이용해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통역됐다. 정환기 간친회장의 인사말과 라 회장의 설명이 있은 뒤 이 행장이 나섰다. 그는 신 사장을 고소할 수밖에 없는 정황을 설명했다.

신 사장의 간단한 발언에 이어 발언대에 선 원우종 신한은행 감사가 파워포인트 화면을 보여주며 구체적인 고소 이유를 설명하자 장내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혐의 내용을 지긋이 듣던 신 사장이 돌연 손을 들었다. “긴급 발언 신청 있습니다.” 그러나 신한지주 측 사회자는 “조금 후에 발언 기회를 드리겠다”며 묵살했다.

바로 은행 측 소송 대리인인 푸른법무법인의 정철섭 변호사가 나왔다. “ 사안이 중대하고 증거가 명백한데다, 증거 인멸 우려가 있다. 이건 명백한 범죄다. 고소를 취소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고 하자 장내가 술렁였다. 주주들 사이에서 “신 사장은 변호사를 안 데리고 왔는데 이거 뭐 하는 짓이냐” “여기가 무슨 재판정인 줄 알아”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정 변호사는 결국 10분 만에 회의장에서 쫓겨났다.

긴급 발언 기회를 얻은 신 사장은 “나는 웃는 낯으로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될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변호사를 데려올 걸 그랬다”고 섭섭함을 토로 했다. 그는 “(설명회가) 불공평하지만 내가 준비를 안 해왔으니…”라면서 “어디서 변호사까지 사주해 와 갖고는…”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주들은 잘잘못을 가리기보다는 어떻게 사태를 조기에 수습할지에 논의를 집중했다. 특히 주주들은 급락한 주가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조기 수습이 낫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사회를 빨리 열어야 한다”는 주문이 이어졌다. 주주대표인 정환기 회장은 “신한주가가 다시 올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 돌아오는 비행기 안=완전히 따로

해가 질 무렵 오후 6시45분 인천행 OZ123편이 나고야공항을 이륙했다. 라 회장은 아침 나고야행 비행기에서와 마찬가지로 2A열에 앉았다. 이 행장도 같이 탔다. 하지만 같은 비행기를 타기로 했던 신상훈 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라 회장은 “신 사장이 오사카에 들렀다 온다고 일정을 바꿨다”고 전했다.

라 회장은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오전 내내 굳어있던 얼굴은 풀려 있었다. 위 부사장과 귀엣말도 했다. 기내식도 비웠다. 비행기에서 내릴 땐 기자들에게 “수고했다. 다시 만나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다”라며 먼저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이번 설명회의 성과에 대해 묻자 그는 “(재일동포 주주들이) 이해를 하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평생 동지와 등을 진 그의 뒷모습이 당당해 보이지 않았다.

나고야=한애란 기자
그림=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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