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감자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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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영숙(1960~2003), 「감자싹」전문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찬방 속에 박혀 있던
세 개의 감자에 싹이 났다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킨다는 감자싹의
성분은 솔라닌이다 물에 녹지 않아
호흡중추나 운동중추를 마비시킨다고 사전에는
씌어 있다 햇빛도 양분도 없는 곳에서
감자는 어떻게 싹을 틔울 마음이 들었을까
슬픔도 때로는 힘이 된다,
침묵도 어느 땐 필요한 법이다, 그런 것이었을까
비죽이 솟은 노란 싹이 꼭 뿔 같다
제 몸에 뿌리를 박고라도 번식하고 싶은 발아 그 슬픈 정수리
무엇을 찌를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내 마음이 나쁘다 이를테면 찬물에 온통 머리를 처박아도
빠지지 않는 사랑 같은 것 추억 같은 것
다 잊어도 나만은 안 잊는다 그런,
잊혀지고 낡아진 꿈을 밀어올리느라 품게 된
독 같은 것 질겨진 혓바닥 같은 것
그 다음에 오는 눈물이라는 것……
감자싹을 도려내는 손길이 아리다
깜깜중에도 눈뜨고 싶은 덩굴 속마음, 내가 너를 버리다니
사랑 평화 그리움 무엇보다 손 뻗어 잡아보고 싶은 푸른 하늘
주섬주섬 싹눈을 주워 흙에 옮긴다 잘 자라 다시 만나자



땅도 햇볕도 물도 없는 세상에 잘못 던져진 감자싹. 하필이면 누군가가 먹으려고 찬장에 넣어 둔 음식에 뿌리를 내린 어린 생명. 그 예쁘고 노란 몸이 새 생명이 아니라 <뿔> 같다고 시인은 안타깝게 말한다. 누가 말리겠는가, 작은 틈만 있어도 뿌리를 내리는 저 생명의 고집불통의 본능을.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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