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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자성하고 한·일협정 재고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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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 공개로 일제 강점기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문서 공개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기보다는 협정 내용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데 그 의미가 있는 듯하다. 한.일 양국이 협정에서 총 5억달러(이 중 2억달러는 유상)로 개인 및 국가보상을 일괄타결했으며, 보상금이 피해자에게 지급되지 않았고 이른바 '경제개발'을 위해 쓰인 것은 이미 문서 공개 이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는 조만간 임시국회에서 '태평양전쟁희생자 생활안정지원법'을 마련해 2조~3조원에 이르는 보상금을 지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일본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서 공개를 결정한 한국정부는 개인보상권을 무시한 협정의 문제점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부의 보상정책을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협정의 오류를 인정하고 즉각 대책 마련에 착수한 한국정부의 처사는 일단 긍정적이다.

문제는 일본이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정부는 그동안 민간 차원에서 수없이 제기된 개인보상권 소송에 대해 1965년 일괄타결을 통해 손배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원칙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게다가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정부의 입장은 피해보상이 아니라 경제 원조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몰상식은 왜곡되고 편협한 역사의식에서 비롯된다. 일본사회에는 여전히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확산돼 있다. 역사상 유일무이한 원폭 피해자라는 고정관념은 원인에 대한 성찰과 가해의식이 자리할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신대.위안부 문제라든가 난징대학살은 '날조'로 간주되거나 무관심의 대상이며, 히로시마 원폭기념관만이 진정한 기억의 장소로 여겨진다. 또한 역사 '주체의 설정'을 위해 2000만명에 이르는 타국의 희생자에 앞서 300만 일본인 희생자에 대한 추모가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가해의 기억은 '자학'이며, 가해 역사의 부각은 '자학사관'으로 매도된다.

전쟁의 원인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지극히 자의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서구로부터 '대동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전쟁이었다. 그래서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고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일본은 자신이 침략자였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시아 국가들이 '대동아 공영'에 참여할 의사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군국주의적 팽창 야욕은 '아시아의 구원'이라는 옹색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했던 '대동아'는 전후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분위기 속에서 헌신짝처럼 잊혔으며, 이와 함께 전쟁의 기억도 사라졌다. 그나마 전쟁의 책임을 의식했던 일본인들은 극소수 군인.정치가에게 모든 죄를 돌렸다. 국민은 언제나 국가의 지배대상이었으며, 따라서 국민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이 궁색한 이유였다. 일본의 빈곤한 역사의식은 그렇게 설명된다.

독일의 과거사 정리는 일본과 비교해 가히 경이롭다. 전후 서독(독일)은 53년부터 다양한 보상법을 제정하고 모든 피해국과 보상협정을 체결했다. 심지어 가해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도 52년 30억마르크에 이르는 국가배상을 했다. 허술한 협정을 들먹이며 보상을 거부하는 일본과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서독(독일)이 90년대 말까지 지급한 보상금 총액은 1300억마르크(약 72조원)에 이른다. 2000년에는 다시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100억마르크(약 5조5000억원)의 강제노동자 보상기금을 마련했다. 연방의회는 찬성 556표, 반대 42표, 기권 22표라는 압도적인 표 차로 기금조성을 통과시켰다. 지난 19일 641회를 맞은 정신대.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집회는 아직도 그 끝을 알 수 없으며, 월 35만원에 불과한 생존 원폭피해자에 대한 지원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이미 34년 전에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던 반면 '천황'은 여전히 '통석(痛惜)의 염(念)'이라는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말로 사죄를 대신한다. 한.일협정은 재고돼야 하며 이를 위한 유일한 조건은 일본의 자기성찰이다.

윤용선 한국외대 외국학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