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듯 모두 떠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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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전갈은 독침으로 유명하다. 사람이나 동물이 전갈 꼬리에 달린 독침에 쏘이면 온몸이 마비되거나 목숨을 잃는다. 서양에 이런 우화가 있다.

전갈 한 마리가 강 건너편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을 때 개구리가 나타났다. 전갈은 개구리에게 머리를 굽실거리며 자신을 등에 태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개구리가 "내가 미쳤냐? 너를 태우면 내 등을 마구 찌를 거 아냐?"라고 반문하며 거절했다. 전갈은 "만약 그런 짓을 하면 우리 둘 다 죽을 텐데 뭣 때문에 찌르니?"하며 개구리를 얼렀다. 그런데 강물 중간에 이르자 전갈이 무작정 개구리 등을 찔러댔다. 죽을 지경에 이른 개구리가 이게 무슨 짓이냐고 외쳤다. 전갈의 답변은 간단했다. "내 천성이지." 더 싸울 여유도 없이 전갈과 개구리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어느 화가 한 분이 그림에 문외한인 나에게 선(線)과 색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화가의 감정이 부드러운가 거친가, 성격이 밝은가 어두운가에 따라 선과 색채의 변화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를 매개체로 해서 화가의 꿈을 읽거나 소망과 사랑의 감정을 몸으로 느낀다면 그림보기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예술가의 창의력이 밀도있게 표현된 그림이나 음악의 밑바탕에 천성이 나타나듯 글쓰는 사람의 평소 생각이나 주장도 글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평론가들은 작품 뒤편에 있는 작가의 속마음을 읽게 된다. 더욱이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그들은 아무것도 숨길 게 없어졌다.

올해는 각 분야에서 엄청난 세대교체가 이뤄졌으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경영 일선의 거품이 빠지고 업계 지도가 바뀌고 있다. 대선을 치르고 난 후 정계도 요동치고 있다. 떠나는 사람과 떠밀려 벼랑에 서있는 사람 그리고 새로운 권력에 줄대려는 사람들로 부산하다. 사람 사는 세상의 기본틀은 바뀌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다툼에는 모함과 질투가 끊이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루머가 횡행한다. 얼토당토 않은 야망을 위해 황당한 행동을 보여주는 정치인들도 목격된다. 그게 어디 정계뿐인가. 그들이 살아온 행동 궤적과 언어의 기록을 통해 모두의 천성을 본다. 전갈의 찌르기 천성에 다름없는 괴팍한 사람들도 우리는 본다. 예술가의 작품에서 작가의 숨소리와 냄새를 맡듯.

'시대의 요구'에 따라 우리들은 제각각 갈 길을 생각한다.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떠나간다. 국가나 조직의 이익이 시대상황과 어긋났다고 판단될 때, 그리고 시장에서 개인의 효용가치가 없어졌다고 생각될 때 자리를 떠나가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일이다. '시대의 요구'가 잔인하고 세상이 억울하다는 주장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모든 이에게 보답하는 길은 역시 조용히 떠나면서 새해 건강을 빌어주는 일이다.

올해 마지막 날 다음과 같은 불교 우화도 머리에 떠오른다.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중요한 역할을 맡겠다고 다툼을 벌였다. 눈과 두뇌를 가진 머리를 온종일 쫓아다니는 데 화가 난 꼬리가 나뭇가지를 칭칭 감은 채 어디 갈테면 가보라며 시위를 벌였다.

별 수 없이 머리가 꼬리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눈도 두뇌도 없는 꼬리가 앞으로 가다가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져 머리와 함께 죽고 말았다.

어느 조직에서나 머리와 손발 역할을 할 사람이 동시에 필요하다. 머리가 손발을 아끼지 않고 손발이 머리를 받들어주지 않으면 뱀이나 전갈·개구리 신세가 된다. 동물이나 곤충과 달리 사람의 천성은 자기수련에 의해 고쳐 나갈 수 있다. 협력과 협동이야말로 생존과 경쟁의 요체다. 독자들에게 새해 만복이 깃들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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