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들 '내탓이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인문학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라기보다는 인문학자들의 위기일 뿐이다."

많은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바로 자신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국무총리 산하 인문정책연구회(이사장 최송화)의 자문기구인 인문정책위원회(위원장 이태수)가 지난해 말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있는 원인을 물은 결과 외적 원인과 함께 인문학자 자신들에게도 적지않은 원인이 있다는 반성이 많았다.

김덕구(건국대.한국사).김형철(연세대.철학).이태수(서울대.철학).정민(한양대.국문학).조한혜정(연세대.사회학).함인희(이화여대.여성학) 등 국내 저명 인문학.사회과학자들이 A4용지 2장 분량으로 이 위원회에 제출한 의견에 따르면 현재 거론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는 ▶미국식 경쟁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학문정책▶외국 이론에 대한 의존▶현장성 부재▶인문학 생산자와 소배자 사이의 괴리 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든 것에 앞서 인문학자들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인문학 연구자가 타 분야와 교류하거나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상아탑에 갇혀 자신들만의 논의에 그치거나 외국 이론을 수입하기에 급급했다는 풀이다.

이 위원회는 이런 의견을 바탕으로 인문학이 위기를 맞은 원인을 집중 분석하고 그 대안을 찾는 워크숍을 거쳐 인문학의 진흥을 위해서는 독자적인 정책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해 열린 이 워크숍에는 강내희(중앙대.영문학).김혜숙(이화여대.철학).문희경(고려대.영문학).박지향(서울대.서양사).안삼환(서울대.독문학).이혜순(이화여대.국문학) 등이 참가했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지속적으로 성장을 구가하려면 인문정책에 기반한 전략이 필요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기구의 설립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인문사회연구회의 자문기구인 인문정책위원회가 과연 이런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일부 인문학자들 사이에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그래서 최근 약 10명의 인문학자가 독자적으로 기구를 설립하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이 논의를 이끌고 있는 한 교수는 "지금 한국사회가 한 단계 성숙하려면 다양한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지적.도덕적 기반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며 "이런 점에서 인문학은 국가발전 전략의 차원에서 양으로 환산할 수 없는 효용을 지닌다"고 말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