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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전기회사, 대대적인 전깃불 판촉행사 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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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00년께 한성전기회사 앞의 매표소.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가로등이 걸린 자리다. ‘밝은 밤’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었으며, 일상생활에서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시간대를 비약적으로 늘렸다. 전등은 출현하자마자 귀신을 쫓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다. (출처: 『한국전기100년사』)

1901년 8월 19일 밤 11시, 서울 동대문 전차 차고에 수많은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육군 부장(副將) 민영환이 예식용 스위치를 올렸다. 순간, 종로 연변 주요 교차로에 설치된 전기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이 전등 개설 예식을 위해 한성전기회사는 밤 9시부터 한 시간가량 특별 전차를 운행하여 시민들을 행사장까지 실어 날랐다.

우리나라에서 전등이 처음 빛을 발한 것은 1887년 2월 10일 경복궁 안에서였다. 그러나 이 전등은 너무 자주 고장 났던 데다가 시설 유지비와 인건비가 많이 들어 ‘건달불’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먹고 노는 건달 같다는 뜻에서 붙은 별명이었다. 더구나 보통 사람들은 이런 불이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서울에 전차를 부설한 한성전기회사는 이어 민간용 전등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1899년 11월 황실 소유의 전등 시설 일체를 구입했다. 당시는 경운궁을 새 황궁으로 쓰고 있던 때라 경복궁에 있던 전등 설비는 이미 쓸모 없이 된 상태였다. 이듬해 4월 10일, 한성전기회사 사옥(현재 YMCA 서쪽 장안빌딩 자리) 주변에 설치된 전기 가로등 3개가 불을 밝혔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등장한 전등은 이것이 처음이었던 바, 1966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날을 기념하여 ‘전기의 날’로 지정했다.

1901년 6월 17일에는 경운궁 안에 6개의 전등을 설치했고, 며칠 후 대한협동우선회사 소속 선박 한성호를 중국 상하이로 보내 사업용 전등 설비를 다량 구입해왔다. 민간에 전등을 판매할 준비를 마친 한성전기회사가 대대적인 판촉행사로 벌인 것이 바로 이 전등 개설 예식이었다. 이때부터 일부 고관과 부호 집 천장에 매달리기 시작한 전등은 밤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았다.

아주 오랫동안, 밤은 귀신이나 도깨비가 지배하는 시간대였다. 인류는 전등 덕에 비로소 밤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전설의 ‘불야성(不夜城)’을 현실 세계로 끌어올 수 있었다. 전등이 출현한 지 10여 년 뒤에는 서울 시내에 아예 밤에만 영업하는 야시(夜市)까지 나타났다.

밤이 생활시간대로 편입됨으로써 인간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풍요롭고 다채로워졌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일하고 많이 놀고 많이 먹고 마신다. 한 세기 전보다 기대 수명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 소비하는 생활시간은 세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그렇지만 요즘 사람들이 옛 사람들보다 행복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전등이 안온한 휴식시간을 줄인 것도 그 원인의 하나일 듯하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