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길목 국정원도청 의혹] 해당 기자들 "통화내용 다 맞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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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나라당이 28일 '국정원 도청자료'라고 발표한 문건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 언론사 사장들과 정치부 기자 30여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한나라당의 폭로 문건에서 나타난 통화시기는 대부분 지난 3월이다. 민주당에선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이 뜨고, 한나라당에선 이회창(李會昌)후보의 지지도가 급락해 내분에 휩싸이던 시기다.

한나라당은 더 많은 '도청자료'를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시기의 것만을 집중적으로 내놓은 것은 노무현 후보에 대한 공격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거명된 기자들이나 언론사 사장은 "대체로 맞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거명된 정치인들의 반응은 소속 정당 또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엇갈렸다.한나라당 의원들은 "맞다"고 간결하게 시인했다.민주당 의원 중 주류에 속한 사람들은 "황당무계한 소설"이라며 부인했고, 盧후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의원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정길(金正吉)전 청와대 정무수석과의 통화에서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자료에 나타나 있는 민주당 김원기(金元基)고문은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하면서 "법적 조치를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엔 정보기관이 공작정치를 했는데 지금은 정보기관 근무자를 중심으로 정당이 공작정치에 나선다"고 비난했다.

KBS 박권상(朴權相)사장에게 노무현 지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한 것으로 돼있는 이강래(李康來)의원은 "있을 수 없는 얘기"라며 "나는 당시 盧후보 캠프에 있지 않았다"며 "내가 朴사장과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한나라당이 소설을 쓴 모양"이라고 했다. 朴사장은 대책회의를 거친 뒤 "李의원과 사적인 통화를 한 적은 있지만 정치적 얘기를 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당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중 박상천(朴相千)의원에게 지원요청 전화를 한 것으로 돼있는 이인제(李仁濟)의원은 "경선 때 지구당 위원장들과 수없이 통화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누구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이 없다"고 했다. 朴의원도 "기억이 안난다"고 비슷하게 답했다. 그러나 당시 이인제 의원 캠프의 대변인을 맡았던 전용학(田溶鶴)의원은 "자료에 나타난 대로 실제 내가 김중권(金重權)전 대표와 만나 '대구·경북 경선 때까지는 사퇴하셔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렸다"고 시인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거의 "통화내용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대부분의 의원이 "휴대전화를 이용했는데 국정원이 어떻게 감청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도 제기했다.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의원은 "서상섭(徐相燮)의원에게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할 뜻을 밝히는 전화를 한 적이 있다"고 돼있다. 안상수(安商守)의원은 "이부영 의원에게서 '김덕룡·홍사덕 의원의 탈당을 막기 위해 희망연대라도 소집해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언론사에 대한 도청도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민병준 한국광고주협회장은 지난 3월 12일 김학준(金學俊)동아일보 사장에게 "비판기사를 자제해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돼있다. 이에 대해 金사장은 "그런 취지의 전화를 받아 의례적으로 답한 적 있다"고 밝혔다.

또 동아일보 기자는 "그무렵 한나라당 김만제(金滿堤)의원에게 탈당 가능성을 묻는 전화를 한 적이 있다"고 했고, 중앙일보 기자도 "김원웅(金元雄)의원에게 그런 질문을 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거명된 각사 정치부 기자들은 대부분 "그런 통화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최상연 기자

chois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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