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전방위 도청 의혹 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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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가정보원이 여야 정치인·언론사 사장·취재기자·기업인·시민단체 관계자 등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불법 도청을 했다는 의혹이 28일 한나라당에 의해 제기됐다. 한나라당 김영일(金榮馹)사무총장은 기자회견에서 "국정원이 각계각층에 대한 무차별적인 도청을 했다"며 25건의 자료를 공개했다.

<관계기사 3, 4면>

이 문건에는 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같은 당 의원 또는 언론사 사장·취재기자 등과 전화한 시점(지난 3월 8~28일), 통화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

문건에 거명된 인사 가운데 일부 언론사 사장과 취재기자, 한나라당 의원은 자신과 관련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민주당 의원들은 통화 사실을 부인하거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그동안 "도청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으나 해당 언론인들이 사실이라고 인정한 부분은 도청이 아니면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국정원의 도청 의혹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문건에 따르면 민주당 이강래(李康來)의원은 지난 3월 23일 KBS 박권상(朴權相)사장에게 "노무현 고문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대해 朴사장은 "盧고문이 좌파 성향을 보여 우익이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며 "김원기(金元基)의원을 통해 盧고문을 중도 내지 우파로 돌려야 한다"고 답변한 것으로 적혀 있다.

민주당 이인제(李仁濟)의원은 지난 3월 13일 같은 당 박상천(朴相千)의원에게 지지를 부탁했으며, 이에 대해 朴의원은 "광주지역 위원장들에게 李고문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

문건은 또 민병준 한국광고주협회장이 같은 달 12일 동아일보 김학준(金學俊)사장에게 "동아일보의 편향적 태도를 비판하는 여론이 많다. 비판 기사를 자제하라"고 요구했고, 金사장은 "긍정 검토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이강래 의원은 "그 시점에 朴사장과 통화한 적이 없고, 盧후보 지지 요청을 한 적도 없다"고 했고, KBS 측도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이인제 의원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金사장은 동아일보 기자를 통해 "그런 취지의 통화를 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이부영(李富榮)·하순봉(河舜鳳)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과 연합뉴스 M기자 등도 자신들이 통화한 내용이 문건에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문건에는 李의원이 지난 3월 21일 같은 당 안상수(安商守)의원에게 "희망연대(한나라당 재선 의원 모임)에서도 김덕룡·홍사덕 의원의 탈당을 만류해 달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M기자는 한나라당 김홍신(金洪信)의원 보좌관에게 金의원의 당 대선 후보 경선 참여 여부를 물은 것으로 문건에 나타나 있다.

한나라당은 이와 관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사과와 신건(辛建)국정원장·도청 관련자들의 파면을 요구했다.

국정원은 "그런 도청을 전혀 하지도 않으며, 그런 식의 조잡한 문건도 만들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민주당 이낙연(李洛淵)대변인은 "한나라당이 출처 불명의 자료로 의혹을 부추기는 공작 정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일 기자

le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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