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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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1세 소년 빌리가 홀연히 날아올랐다. 그가 오른 하늘엔 냉랭한 탄광촌의 겨울이 없었다.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없었고, “살려내라!”는 파업의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발레를 향한 오롯한 열정만이 숨쉬고 있었다. 그건 단지 허망한 몽상일까.

2010년 최고 기대작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가 13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탄광촌 소년 빌리가 꿈에 그리던 로열 발레 스쿨에 입학한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지금 한국 뮤지컬계가 가장 염원하는 주문일지도 모른다. ‘신(新) 빙하기’로 불릴만큼 꽁꽁 얼어붙은 최근 한국 뮤지컬 시장에 소년 발레리노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을까.

아버지(조원희)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기 재능을 발휘하는 빌리(김세용). 투박한 아버지의 속 깊은 정이 하나 둘 전해지는 건 작품의 큰 골격을 이룬다. [매지스텔라 제공]

◆빌리의 원맨쇼=파업을 주도했던 고집 센 아버지, 치매에 걸린 할머니, 과격한 행동주의자 형, 그리고 담배를 연신 물고 다니는 발레 선생 윌킨슨 부인…. 작품엔 여러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 채 등장하지만 결국 남는 건 소년 빌리다. 일찍이 이런 뮤지컬은 없었다. 아역 배우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호객 행위로 잠깐 등장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무대에서 2시간이 넘는 시간을 아역 배우가 감당하기란 불가능으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빌리는 이런 통념을 무너뜨렸다. 단단한 연기력으로 극의 중심을 잡아가고, 다이나믹한 움직임으로 객석을 끌어당긴 뒤 애틋한 선율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절대적인 비중 탓에 선발 과정은 까다로웠다.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150㎝ 이하의 소년이 첫 번째 조건. 발레·탭댄스·아크로바틱·노래·연기력 등이 두루 갖춰져야 했다. 지난해 2월부터 시작된 오디션은 무려 4차에 걸쳐 1년간 지속됐으며 800여 명의 넘는 소년들이 지원해 4명의 최종 빌리가 가려졌다. 김세용(13)·임선우(10)군은 군더더기 없는 발레 테크닉으로 시선을 끌었고, 이지명(13)군은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정진호(12)군은 착착 떨어지는 탭댄스가 주무기다.

◆전복의 미학=1막 마지막, 집안의 반대로 오디션에 가지 못한 빌리가 분노의 마음을 상상 속의 춤으로 풀어낸 장면은 마치 뮤직 비디오처럼 강렬한 시퀀스의 연속이었다. 2막 초반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에 맞춰 미래의 자신과 파드되(2인무)를 출 땐 객석마저 여행을 떠나듯 아득해졌다. 전율처럼 다가오는 ‘Electricity’, 콧끝을 찡하게 하는 어머니와의 재회 등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작품의 미덕은 현실에의 반추였다. 1980년대 ‘철의 여인’ 대처 총리 시절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시대적 고민을 피해가지 않은 채 파업의 불가피성과 한계라는 꽤나 껄끄러운 문제를 정면 돌파해 나간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할 것 같은 발레 연습실이나 구더기가 나올법한 부엌의 사실감은 어쩌면 ‘빌리 엘리어트’가 제기하는 근본적 물음일지도 모른다. 뮤지컬은 언제까지 판타지만을 선사할 것인가. 뮤지컬이란 장르는 시대의 거울이 될 수 없는 것인가.

다만 공연 초반인 탓인지 과격한 번역투의 문장, 배우들간의 어설픈 호흡 등은 부족한 부분이었다. 2005년 영국 초연때부터 제기돼 온, 귀에 쏙 박히는 노래가 없다는 점도 아쉬웠다. 02-3446-9630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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