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셉션’에서 100년을 앞선 천재 이상을 찾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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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호 05면

‘박제된 천재’ 이상(본명 김해경·1910~37·사진). 그는 어떻게 아시아 작은 식민지 국가에서 탈장르, 초학문, 아방가르드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그의 작품에 매료된 예술가들이 생전 파리를 동경했던 이상을 프랑스 문화예술계에 소개하는 오마주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파리의 복합문화공간 라 제네랄과 서울의 현대문화예술기획팀 랩201이 공동으로 기획한 국제교류 프로젝트 ‘2010 파리/서울, 이상-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다.

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의 밤, 11일 서울 한남동 공간해밀톤

전시, 토크, 퍼포먼스, 워크숍 등의 형식으로 구성된 이번 프로젝트는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 파리에서의 1부 전시를 마치고 2부 서울 전시를 8월 5일부터 시작했다. 파리를 동경했던 천재예술가 이상을 파리로 보낸다는 컨셉트의 1부 ‘파리로 간 이상’에 이어 2부는 파리에서 돌아온 이상이 스스로를 가두었던 상자에서 나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날개를 펼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이상 다시 살다’로 기획됐다.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인 문학의 밤 행사가 11일 오후 서울 한남동 공간해밀톤에서 열렸다. 이날의 백미는 서울대에서 이상 문학을 전공한 독일인 조기테(Gitte Zschoch)의 낭독 퍼포먼스. 이상의 시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프란츠 카프카의 원전을 낭독하는 가운데 중간중간 삽입된 영화 ‘인셉션’의 장면들이 서로 기막히게 맞물렸다(큰 사진). 거울 속에 갇혀 무한 반복되는 자신의 모습에 혼란스러운 주인공과 ‘오감도’의 시구(“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고.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온다”), 영화 속에 나오는 에셔의 무한계단 이미지와 ‘운동’의 시구 “일층우에있는이층우에있는삼층우에있는옥상정원에올라서남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의 댓구는 꿈과 미로의 혼란과 공포라는 초현실적 문화코드를 21세기의 크리스토퍼 놀란과 100년 전의 이상이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번역가 정재원의 이상론 ‘Hello, Yisang’ 낭독은 식민치하에서 이상이 느꼈던 공포와 혼란의 실체, 즉 침략당해 정체성을 잃어버린 국민이 그것을 되찾으려 할 때 애초에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혼란에 대해 환기시켜 주었다.

소설 『꾿빠이 이상』의 작가 김연수는 아티스트 구민자와 영상작품 ‘시를 읽어주세요’를 함께 만들었다. 이상의 생활공간이었던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오감도’ 열다섯 편을 낭독하게 한 것을 촬영한 비디오 영상이다. 그는 촬영을 위해 광화문 광장 허가를 받기까지 벌어진 에피소드를 낭독했는데, 반복해 등장하는 단어들을 과장하고 강조해 마치 이상의 시를 연상케 했다. 그는 이상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자신의 소설 『꾿빠이 이상』의 마지막 부분을 낭독하며 끝을 맺었다. “그 비밀이 뭔지 알 수 없는 한, 이상이란 미친 놈의 개수작에서 위대한 명작 사이를 한없이 오르락내리락할 뿐이었다. 진짜라고 믿는 자에게 그 세계는 진짜처럼 보이고 가짜라고 믿는 자에게 그 세계는 가짜처럼 보인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가상인지,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생시인지, 크리스토퍼 놀란과 마찬가지로 김연수의 고민도 한 세기 전 이상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2010년 서울, 이상의 부활이다.공간해밀톤의 작은 전시공간은 그 자체가 이상을 되살린 한 편의 시였다. 에마누엘 페롱, 해롤드 슈링스, 박창현, 구민자, 김연수, 유희숙 등 유럽과 한국의 아티스트들은 시각적 공간구조와 물리적 시간개념을 가진 이상의 시를 시각적 텍스트 독해방식으로 펼쳐 보였다.

공동기획자인 파리7대학 수학과 교수이자 사운드 아티스트인 에마누엘 페롱은 1부 ‘파리의 이상’에서 이상의 시 가운데 수학 기호, 외국어 등 그래픽적 요소가 나타난 시구를 선택해 포스터를 만들어 거리에 붙이고 사진으로 찍는 작업을 반복했다. 서울에서는 이 작업을 작은 과학 실험실의 형태로 축소시켰다. 이상의 시에 등장하는 현미경, 실험실의 기구, 프리즘, 거울 등의 빛의 굴절, 거리의 왜곡을 통해 직선을 곡선이 되게 한 오브제로 파리에 간 이상의 시선을 표현했다.

박창현의 ‘채움으로 비워짐’은 벽과 기둥이 생략되고 연약한 고무줄로 지탱되는 협소한 공간을 공간해밀톤의 좁고 긴 복도에 설치한 작품이다. 관람객은 이 불안한 고무줄 통로를 지나가면서 이상의 작품 속 심리적 공포를 체험하게 된다.

철사와 고무지우개로 만든 상자 모양의 작은 모듈이 넓은 공간으로 퍼져나가도록 한 유희숙의 설치 작품 ‘FIS-2’처럼 100년 동안 상자 속에 갇혀 있던 천재 예술가의 감성이 한 세기가 지난 2010년, 상자를 뚫고 나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기를. 전시는 21일까지 공간해밀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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