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공공개혁이 과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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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년 전 이맘 때 우리 경제는 숨이 가빴다. 외채상환 요구가 쇄도하고 외환보유고가 급속히 고갈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정부의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에도 사태는 악화돼 갔고 11월 21일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다. 바야흐로 'IMF 신탁통치'가 시작됐고 이 체제가 주는 고통에서 우리 국민은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러나,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한국민의 저력 덕분에 이제는 외환위기 경험국 중 가장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국제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5년 간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의 기본 철학으로 내걸고, 금융·기업·노동·공공 등 4개 부문에 대한 구조개혁 추진을 위기 극복의 기본 과제로 설정했다. 그런데 개혁 5년이 지난 현재 국가경제의 전반적 지표 호전에도 불구하고 4대 개혁의 성과는 고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금융·기업 부문에서 상대적으로 뚜렷한 개혁의 성과가 나타난 반면 공공·노동 부문의 구조개혁이 미진하다는 것이 국내외의 일반적 평가다. 노동 기준은 여전히 국제 수준과 차이를 보이고 있고 공공부문은 과연 어떤 구체적인 개혁이 있었고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는지 더욱 더 종잡을 수 없다.

수치상으로 상당한 구조조정 성과를 이룬 듯한 금융부문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과연 우리 금융산업이 자생력과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서 다시 태어났는지 의문이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 비율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는 막대한 공적자금 투입이라는 큰 비용을 지출한 덕분이다. 비용을 감안할 때 효익은 썩 자랑스러운 것이 못된다. 아직도 불안한 금융 시스템은 시중 유동성을 생산현장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국제금융시장에 대표선수로 내세울 만한 선진 금융기관은 생겨나지 않았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춘 투명성과 책임성의 확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진행된 기업 개혁도 그 방법론에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대기업집단에 대한 출자총액 제한, 획일적 부채비율 적용, 집단적 퇴출작업 등 시장경제의 근본적 골격을 훼손하는 정책이 다수 추진됐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질서 정착을 국정의 제일 운영원칙으로 내세운 현 정부 역시 공정한 경쟁풍토를 조성하는 데 성과를 거두었기보다는 역대 정부와 같이 자원배분에 직접 간여했던 것은 아닌지 냉정히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경제에는 중국 경제의 부상,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기능할 신산업의 부재 등 많은 어려움이 잠복해 있다. 앞으로 위기의 재발이 없을 것이라는 장담도 할 수 없다. 자화자찬에 취해 있기보다 차분히 지난 5년 간 개혁의 손익을 셈해 보고 현재 국가경제의 대차(貸借)를 점검해 향후 개혁의 지침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 최소한 앞으로 10년 이상 한국이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으려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상황도 우려된다.

따라서 향후 정부 정책의 우선과제는 중장기적 경제운용 청사진 마련과 함께 법치주의의 확립과 명실상부한 시장경제의 정착에 두어져야 한다.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성장한 우리 경제의 외형에도 불구하고 제도와 법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진정한 선진국으로의 국정운영의 모습은 아직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4대 개혁부문 중 미진했던 노동과 공공개혁에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공기업 민영화 등 추가적인 공공개혁은 물론 기업의 국제경쟁력 확보를 위해 무엇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가 시급하다.

금융개혁의 경우 외형적 부실의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만큼 이제는 민영화와 책임경영체제 확립, 선진적 금융운용기법의 체화(體化) 등 소프트웨어적 금융개혁에 집중해야 한다. 기업 역시 이제는 국제적 투자자의 수준에 맞춘 투명성 강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시기다.

지난 5년 간 우리 경제는 험한 길을 지나왔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먼 길이 앞에 놓여 있다. 정부·기업·근로자 우리 모두 서로의 지난 수고를 치하해 주고, 다시 한번 의지를 복돋워 각자의 위치에서 새 천년의 선진경제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웅비를 준비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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