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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 65년, 오바마도 핵 감축 팔 걷었지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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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위협적인 늑대의 존재를 무시하며 자신을 기만하다 잡혀 먹힌 ‘양치기 소년’의 교훈을 곧잘 잊는다. 핵무기도 비슷하다. 65년 전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원폭으로 죽은 자는 없었다. 냉전의 긴장감은 옛말이 됐다. 핵무기 때문에 횡액(橫厄)이 닥칠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를 관료와 대중은 너무 쉽게 무시하고 있다. 원폭이 지금처럼 잘 관리되고, 핵 확산을 막으려는 노력이 계속된다며 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재앙 없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우연일 뿐이다. 정치력의 힘이나 뛰어난 관리 체계 덕이 아니라는 소리다. 지금 세상엔 히로시마 원폭의 15만 배에 이르는 파괴력을 가진 총 2만3000기의 핵무기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중 7000기가 배치돼 있고, 2000기는 경보즉시발사(launch-on-warning)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우리의 행운이 무한하게 유지될지 자신할 수 없는 이유다.

군사 무기에 대한 명령통제 체계가 아무리 정교해도 무결점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냉전 이후의 미국과 소련에서 일어난 여러 실수와 시스템 붕괴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핵무장에 새로 뛰어든 국가에선 그런 시스템이 더 조잡하다. 특히 시스템의 정밀도 여부를 떠나 사이버 공격으로 핵무기 사고가 터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금의 균형 상태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여기에 핵무기 확산 공포까지 실재하는 상황이다. 특히 중동이 그렇다. 실수나 계산 착오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위험이 더욱 커진 것이다. 또 무국적 테러리스트가 안전장치가 미흡한 핵무기나 핵물질을 손에 넣은 뒤 대중이용시설에서 폭발시킬 것이란 걱정도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 그리고 핵 에너지 기업들까지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 공장을 짓겠다고 나서는 마당이다. 모두 핵무기 재료가 되는 것들이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한 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겠다고 단호히 나섰다. 지금까지 어떤 미국 대통령도 핵무기를 제거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오바마의 핵 리더십은 10년 넘게 몽유병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일깨우며 지난 1년 반 동안 일부 성과를 보였다. 미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전략무기감축협정을 맺어 실전 배치된 핵무기를 줄이고, 워싱턴에서 열린 핵 안보정상회의를 통해 진전된 핵 안전 태세를 갖추기로 한 것이 그런 예다. 2012년엔 중동을 비핵지대로 만들기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키로 했다.

그러나 전략무기감축협정에 대한 미 상원의 비준은 늦어지고 있는 데다, 다른 주요한 핵 이슈에 대한 해법도 진전이 없는 게 문제다.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의 이행이나 핵물질 생산 금지에 대한 새로운 협정 시작이 그렇다. 무엇보다 미국과 러시아라는 양대 핵 강국을 포함해 핵으로 무장한 8개국이 모여 새롭고 심각한 군축 협정을 시작해야 한다.

무기 통제와 군축은 짧은 시간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끝이 보이지 않고 따분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국내 이슈와 정권 재창출만이 정치 이슈를 지배하면 이런 작업은 더욱 시들해질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선 통치자들의 핵 리더십이 꾸준히 살아있어야 한다. 특히 미국 오마바나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같은 이들이 그렇다.

그들에게 당면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사람들의 착각을 없애는 것이다. 메시지는 냉혹해야 한다. 핵무기가 무차별적 살상 무기라는 사실뿐 아니라 지구상 생명체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야 한다. 이산화탄소도 우릴 죽일 수 있지만, 핵폭탄만큼 빠르진 않다.

두 번째 주요한 임무는 군축협상을 명확한 글로벌 어젠다로 확정하는 일이다. 군축 일정을 분명히 하고 기념비적인 내용도 담아야 한다. 지금 당장엔 지구촌의 모든 핵무기를 철폐하는 ‘글로벌 제로(global zero)’까지의 일정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컨대 2025년까지 세계의 핵무기를 지금의 10% 미만으로 줄인다는 등으로 목표를 설정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닐 것이다. 세계가 원폭 투하 65주년을 기억하는 이때, 우리는 핵전쟁을 피해 갔던 우리의 운이 점점 쇠락하는 건 아닌지 새겨봐야 한다.

ⓒProject Syndicate

가레스 에번스 전 호주 외무장관, 국제 핵비확산군축위원회 공동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