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바로 신용이에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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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강신용(가명·18)군의 지갑엔 현금이 없습니다. 신용카드 몇 장만 들어있습니다. 그래도 姜군은 생활하는 데 불편하지 않습니다. 물건을 살 때나 식사를 할 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도 카드를 쓰면 되니까요.

그렇다고 姜군이 돈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일 뿐, 한달이나 두달 뒤 정해진 날에 신용카드 대금을 내야 합니다. 姜군이 카드사와 약속한 날에 돈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이 돈을 석달 이상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신용카드의 '신용'은 뭐고, 신용불량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은 '신용'의 뜻을 '믿고 씀', '믿고 의심하지 않음'이라고 설명합니다. 맞습니다. 姜군이 현금없이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은 카드사가 먼저 姜군 대신 돈을 지불하고, 나중에 姜군으로부터 돈을 받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이지요. 姜군 입장에선 물건을 신용으로 살 때 미래에 갚아야 할 빚이 생기는 것이죠. 그러나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놓고, 나중에 카드 대금을 내지 않으면 '약속'과 '믿음'이 깨집니다. 그래서 '신용이 없는 사람' 즉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입니다.

휴대전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휴대전화 통화를 하더라도 전화요금은 한달에 한번만 내게 됩니다. 이것도 이동통신회사와 휴대전화 사용자 사이에 전화요금을 나중에 내겠다는 약속과 신뢰가 있으니까 가능한 겁니다. 사용자가 휴대전화 요금을 내지 않으면 이동통신회사는 그 휴대전화의 사용을 정지시키고, 그 사람은 신용불량자가 될 것입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신용이 좋은 개인이나 회사는 돈을 제 때 잘 갚을 테니까 집같은 담보를 내놓지 않아도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습니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돼 더 이상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신용불량자는 9월 말 현재 2백45만여명이며, 이중 10대 신용불량자가 9천여명, 20대 불량자는 42만3천여명이나 됩니다.

신용이 좋은 지 나쁜 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을 가리는 일을 신용평가라고 하고, 이런 일을 하는 회사를 신용평가회사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신용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선 금융회사에 돈을 맡기는 사람이 줄어들 것입니다. 금융회사를 믿을 수 없게 돼 맡긴 돈을 나중에 찾지 못하게 될 것 같으면 많은 사람이 금융회사에 돈을 맡기느니 현금으로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금융회사도 돈을 잘 빌려주지 않겠지요. 기업이나 개인이 필요한 돈을 제때 빌릴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기업이 공장을 짓기 힘들어지고, 개인들도 현금 없이는 물건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생산이 줄고, 소비가 얼어붙게 되겠죠. 신용이 무너지면 이로 인해 실업 증가→소비 위축→판매 감소→생산 감소→고용 감소→실업 증가의 악순환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생활은 '신용'을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신용사회'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자신의 신용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요. 금전 거래나 물건 거래 때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소비자가 카드를 긁거나 대출을 받는 것, 기업이 외상으로 물건을 사는 일 등이 모두 신용을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약속된 날짜에 제대로 돈 거래, 물건 인도 등이 이뤄지도록 해야 합니다.

개인과 기업·금융회사에만 신용이 있는 게 아닙니다. 나라에도 신용이 있습니다. 이를 국가신용등급이라고 합니다.

국가의 신용에 대한 평가도 개인의 신용평가와 같은 원리로 이뤄집니다. 즉 국가신용이란 그 나라가 안전한 지, 그래서 그 나라 정부나 기업을 믿고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지를 나타내는 지표인 것입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나 무디스라는 회사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죠. 외환위기 이후 국내에서 유명해진 이 회사들이 바로 국가신용등급을 전문적으로 매기는 곳입니다.

국가신용등급이 좋은 국가는 낮은 금리로 직접 해외에서 돈을 빌릴 수 있고, 신용등급이 나쁜 국가는 아예 돈을 빌리지 못하거나 이자를 많이 물게 될 것입니다.

국가신용등급은 국가뿐 아니라 그 나라의 기업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기업이 외국 사람이나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달라고 신청했다고 합시다. 이 때 외국에선 그 기업의 신용이 어떤 지를 주로 살펴보겠지만, 동시에 그 나라의 신용이 어느 정도인 지도 보게 됩니다. 전쟁이 잘 터지는 나라의 기업이라면 기업의 신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전쟁의 위험 때문에 돈을 잘 빌려주지 않거나 높은 이자를 물리는 식이죠.

국가신용이 나빠지면 해외 투자자들이 이미 빌려줬거나 투자한 돈을 되찾아가는 일도 생깁니다. 외국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그 나라가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1997년 말 우리나라에 닥친 외환위기가 그런 경우지요. 그 무렵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은 A-에서 BBB-(S&P)로, A3에서 Ba1(무디스)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은 그 뒤 국민 모두의 노력으로 좋아졌고, 이에 힘입어 지금은 국가신용등급도 외환위기 이전으로 회복됐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신용이 돈이라는 점을 명심합시다.

이상렬 기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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