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화는 누가 시키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두 후보는 단일화에 합의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높이 들었다. 마치 역사적인 큰일을 해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양金이 경쟁하던 80년대에는 민주화를 위해 두 金씨가 단일화 하기를 바랐다. 그때는 민주화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단일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선거에 이기기 위한 단일화다. 그런 단일화는 나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후보의 입장에서는 이겨야 하고,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없으면 합종연횡을 해서라도 이기면 되는 것이다. 국민의 입장에서도 결승전에 앞서 예선전을 한번 더 볼 수 있게 됐으니 나쁠 것이 없다. 여론조사로 하든, 제비 뽑기로 하든 자기들 끼리 먼저 예선을 치르고 본선에 나가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다. 본선에 나왔을 때 우리는 한 표로 심판을 내려주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석연치 않다. 이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도 되는 것인가. 그런 행동은 과연 옳은 것인가.

민주당은 간판을 내려야 한다. 수만의 대의원을 동원해 소위 역사적(?)인 국민경선으로 후보를 뽑아놓고 그 후보를 여론조사로 다시 바꾼다니 당(黨)도 아니다. 앞으로 민주당이 살아 있다면 과연 그 당에서 후보가 나온들 누가 믿겠는가. 두 후보는 자기의 지지자들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다.

살아온 배경이나, 이념이나, 정책에서 도무지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이 합치겠다니 그들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멍해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 후보가 지향하던 세계, 정몽준 후보가 구현코자 했던 세계가 다른데 어떻게 갑자기 합치겠다는 말인가. 내가 합치겠으니 당신들은 따라오라는 얘기인가. 이 얼마나 지지자들을 무시한 소행인가. 이것이 선례가 돼 선거 때마다 명분 없는 이기기 위한 짝짓기가 벌어질 것이니 그 혼란과 역겨움을 두고 두고 보게 생겼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단일화로 나서는 것일까. 상식과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줄 알면서 왜 단일화에 매달릴까. 야당의 주장대로 청와대의 힘 때문일까. 음모 때문일까. 누가 단일화에 힘을 실어주는 것일까. 감히 말하건대 그 힘은 반창(反昌)의 정서다. 단일화를 잉태케 하는 동기는 바로 이회창 후보측에서 만들어 주고 있다는 얘기다. 이 정권의 그 많은 실정에도 불구하고 그 대안세력으로서 30%대를 넘지 못하는 지지율이 이들로 하여금 단일화로 가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 이들은 명분 없는 단일화에 대한 비판 보다는 반창의 정서가 더 깊다고 판단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앞으로 단일화가 힘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단일화 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회창 측에 달려 있다. 즉 반창의 정서를 얼마나 극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반창의 정서는 어디서 오는가. 첫째,지역성에 기인된다. 호남정권 때 욕을 봤으니 이제는 경상도가 다시 정권을 찾아와야 한다는 층이 지지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인상이다. 영·호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은 이제는 지역감정으로 정치가 휘둘려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다. 표를 위해 경상도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타 지역의 반창정서는 넓어진다. 이는 정치보복과도 연결돼 있다. 정치보복을 당할 것이 확실하다는 우려가 있는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선거에서 이기려 하지 않겠는가. 보통국민들은 정권교체와 상관 없이 평화롭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둘째, 과거 회귀를 우려하는 층이 넓다. 통일문제만 하더라도 DJ정권 5년간 우리 내부의 이념지형은 매우 달라졌다. 이 현실을 무시하고 다시 5,6공의 시대로 복귀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층이 많다. 이미 변화된 현실은 인정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 합당한데 제대로 될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과거의 인물들이 그 진영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그런 걱정이 왜 안 나오겠는가.

셋째, 어떤 나라·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지, 새 정권이 들어서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전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데서 실망하는 층도 많다. 40대 이하의 젊은층이 외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변절자든 누구든 긁어 모아 지지율 몇%만 더 올리면 선거는 끝난다는 식의 사고로 무슨 꿈과 이상을 말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남은 한달간의 선거기간은 반창 정서와 단일화 힘 간의 싸움이다. 핵심 변수는 역시 반창 정서가 어떻게 변화돼 가는가에 달려 있다. 단일화 국면은 비록 명분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다자구도라면 이미 끝난 선거"라며 반창 정서의 치유를 외면하던 야당의 오만에 새 자극을 준 점에서는 기여하는 바가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