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정리' 모르는 경제 원시인이라도 사는 방법은 다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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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언제나 날 야유했다. "네가 글 쓰는 것 말고 잘 하는 게 뭐가 있니?"뭔가 반박은 해야겠는데 틀니 낀 노인, 뜸 덜든 보리밥 대하듯 나는 늘 우물거렸었다. 나 스스로도 이렇게 기능적인 시대를 횡단하기엔 덜 떨어졌다고 생각하니까. 편집장이면서도 수리력이 최악인 나 대신 편집실 관련 살림을 맡아주던 상사도 이렇게 경제관념 없는 편집장은 처음이라며 괴로워했다. 사람들은 "네가 이렇게 오래 회사에 다닐 줄 몰랐다"지만, 그건 나부터도 신기해 죽겠는 일이다.

은행에 갔다. 다른 은행으로 송금할 일이 있었다. 내가 아는 송금 방법은 양식의 빈 칸을 채워 창구에 내미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은행 여직원은 더 편리한 방법이 있다고, 나를 현금지급기로 안내해 카드로 계좌이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통장정리를 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에'통장정리'라는 게 있는 줄 난 몰랐었다. "통장정리가 뭔데요?" 굴처럼 희멀건해진 내 눈을 보며 은행원은 기함을 했다. "저… 한국분 아니세요?"은행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 나는 미립자처럼 작아져 다시는 지구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저녁에 친구를 만나 아침의 일을 들려주었다. 가슴이 다시 장마철 군대모포처럼 무거워졌다. 그러니까 남들이 정당하고도 기민하게 자신의 터를 잡고 있을 때, 이렇게 지리멸렬 모아둔 돈도 처자식도 없이 기신기신 사는 거지, 그런데도 뭘 믿고 그렇게 턱없이 낙천적이었을까? 물론 내가 생각하는 장점도 있다. 언제나 선한 부분을 자극받는, 연민이 많은 성정, 가치있는 것들을 변별해내는 안목…. 솔직히 더는 생각나지 않는다. "네가 그런 데 서툰 건, 누군가 네가 못하는 걸 도와주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해도 잘 살아왔잖아." 히말라야에서 요가하다 한국에 들른 구루의 현신처럼 그가 말했다.

그렇게 번번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처지라면 뭐가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온 건 나를 도와주는 숱한 마음들 때문이라는, 나 답지 않은 지혜가 밀려오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어 이쪽 끝을 탁 치면 저쪽 끝이 흔들린다는.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다. 그는 술 마시고 싶은데 돈이 없었다지만, 그날 내가 낸 알량한 술값은 그가 준 위로에 한참 못미치는 것이었다.

이충걸 <『GQ코리아』 편집장·norway@doo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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