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도입 10년 러시아 계속 고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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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빼앗긴 자들이여, 빼앗은 자들의 것을 빼앗아라!"

1917년 11월 7일(러시아력으론 10월), 러시아의 급진 혁명세력인 볼셰비키는 이런 슬로건을 내걸고 궁전을 장악했다.

자극적인 문구에 현혹된 민중들은 총과 칼을 들고 "부르주아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0월 혁명은 이렇게 세계사의 흐름을 바꿨다. 그 결과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이 수립됐고, 이후 70년 이상 사회주의 국가의 맏형으로서 자본주의와 체제 경쟁을 통해 영향력을 키웠다.

사회주의 사상이 싹튼 것은 18세기 말로 러시아 혁명 당시 이미 1백5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이 사상은 빈부격차와 유아·여성 근로자에 대한 착취가 심해지면서 힘을 얻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말에서 당시 공산주의의 위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러시아였을까? 오랜 연구 끝에 역사가들은 1904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차르 정부의 권위가 실추된 데다 계속된 실정으로 국민을 빈곤에서 구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빈곤과 실정으로 분노한 러시아 국민들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패색이 짙어지자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섰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19세기에는 초강대국 영국에 대적한 유일한 나라였고, 20세기 들어서도 미국과 끊임없이 대치했다. 인구로도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의 대국으로 옛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여전히 강대국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경제 후진국'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봉건시대의 유물인 농노제가 1850년대까지 존속됐고, 체제 붕괴 직전에도 전체 인구의 3분의1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런 러시아가 최근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미국·일본·유럽연합(EU)등 선진국들이 경기침체에 시달리는 가운데 구미 국가 중 유일하게 고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경제(국내총생산·GDP 기준) 성장률이 99년 5.4%에서 2000년 9.1%로 높아졌다. 테러의 여파로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한 지난해에도 러시아는 5%의 성장을 일궜다. 일부 전문가들은 향후 세계 경제의 견인차 중 하나로 러시아를 꼽을 정도다.

물론 이같은 고성장의 이면에는 어두운 측면도 있다. 원유 수출 의존도가 지나치게 큰 데다 뇌물 액수가 한해 3백60억달러에 이르는 등 부패구조가 심각하다. 중국과 달리 외국 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장경제를 도입한 지 10년을 넘어서면서 러시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재광 경제연구소 기자

imi@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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