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지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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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독일 시내도로의 제한속도는 시속 50㎞다. 그러나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독일인들도 보통 시속 55㎞ 정도로 달린다. '인내 속도'라 하여 제한속도의 10%, 즉 5㎞ 초과까지는 단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인 카메라도 시속 55㎞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모두가 시속 50㎞를 지킬 때가 있다. 한적한 도로에서까지 규정속도로 서행하는 자동차 행렬을 따라 가자면 짜증이 난다. 슬금슬금 추월해 맨 앞엘 가면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된다. 경찰차가 보란 듯 50㎞로 주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웬만한 배짱으로는 정확히 규정을 지키는 경찰차를 추월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독일 경찰이 꼭 '무서운' 것만은 아니다. 10년 전쯤 베를린에 주재하던 한 한국인이 경찰의 심야 단속에 걸렸다. 과속을 한 데다 당시 음주운전 허용치인 혈중 알코올농도 0.08%를 넘을 정도로 거나했다. 과속 딱지를 끊던 경찰관이 냄새를 맡고는 술을 마셨느냐고 물었다. 그는 솔직히 음주사실을 시인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아무래도 위험하니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그를 옆자리에 태웠다. 집에 도착한 경찰관은 열쇠를 건네주고는 뒤따라온 경찰차를 타고 사라졌다. 지금이야 독일에서도 음주운전을 세게 단속하고 있어 어림없는 얘기지만 분명히 있었던 실화다.

그러면 독일인들은 경찰을 어떻게 생각할까. 놀라지 마시라. 모든 공공기관 중 경찰을 가장 신뢰하고 있다. 며칠 전 디 벨트지가 세계경제포럼(WEF)의 전 세계 47개국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독일 경찰의 신뢰도는 86%로 모든 공공기관 중 가장 높았다. 이어 군대가 70%로 2위를 차지했고, 법원(59%)·정부(51%)·언론(49%)·의회(48%)가 뒤를 이었다. 교회가 39%로 꼴찌를 한 것도 특이하다.

독일 경찰이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를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한마디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민중의 지팡이'이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우리 경찰은 어떤가. 물론 남 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경찰관들도 우리 주변엔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에게 경찰은 아직 '가능하면 안 만나는 게 좋은 나으리'일 뿐이다. '민중의 지팡이'보다는 '민중의 몽둥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실망할 것은 없다. 한때 독일 경찰도 게슈타포로 대변되는 공포의 상징이었으니까. 이제라도 우리 '투캅스'들이 환골탈태(換骨奪胎)한다면 국민의 경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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