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경제 占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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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대 그리스 때 어느 국왕이 시비를 걸어오는 이웃나라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맞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참고 양보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해 점을 쳐보기로 했다. 그가 아폴로 신전의 무녀로부터 신탁(神託)이라고 받아낸 것은 "전쟁 나면 이긴다"라는 구절이었다. 국왕은 곧장 싸움을 시작하지만 대패하고 만다. 만신창이의 몸으로 무녀에게 따지자 그녀의 대답인즉 "전쟁 나면 이긴다고 했지만 어느 쪽이 이긴다는 얘기는 안 했다"는 것이었다.

대선이 임박하면 점술가들은 당선자를 맞혀 보라는 주문에 시달린다. 노회한 도사라면 그리스 무녀처럼 애매모호한 답변을 할 게다. 후보 이름을 직접 거명하기보다 목(木)성 또는 토(土)성을 들먹이거나 이긴다는 얘긴지 진다는 얘긴지 알쏭달쏭한 점괘를 내놓고 해석은 듣는 사람에게 맡긴다는 식이다.

무녀나 도사들에 비하면 훨씬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내년 경제를 점쳐야 하는 예측 전문가들이다. 우선 이들은 모호한 전망을 낼 수가 없다. 몇 % 성장에 인플레율은 얼마라고 분명한 답안을 내놓아야 한다. 게다가 전망은 보고서로 남고 언론에도 두루 소개가 되기 때문에 나중에 제대로 맞았는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위험이 있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외환위기 전후 한국경제와 최근 미국경제에 관해 엉터리 전망을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때인 만큼 내년 한국경제에 관한 전망 발표가 줄을 잇고 있다. 현재까지 나온 예측 중 가장 낙관적인 것은 내년에도 올해 수준의 6%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비관적인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내 예측기관들은 5%대의 성장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가 하면 골드먼삭스는 내년 성장률이 4%대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내년 경제를 어둡게 보는 근거는 여러 변수 때문에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데 있다. 대외적으로는 이라크 전쟁 위험, 미국경제의 침체 가능성, 중국경제의 순항 여부, 그리고 국내에서는 대선 결과와 남북관계가 주요 변수들이다.

대내외 요인으로 불확실성이 확산되면 경제활동은 위축되게 마련이다. 특히 올해 성장을 이끌어 왔던 소비활동은 이미 둔화 조짐을 보이고 있어 걱정이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만일 정책당국이 위험 수위의 가계대출을 줄이고 나아가서 부동산 열풍을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면 소비는 더욱 급격하게 식어갈 염려가 있다. 이런 전망이 반드시 맞아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우리로서는 내년의 경제적 어려움을 일단 받아들이고 대응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 듯싶다.

물론 기댈 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수출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전쟁·석유파동·세계경제 불황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만 전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수출 확대가 가능하다. 노사가 협조해 경쟁력을 높이고 해외시장 개척에 나선다면 수출이 늘어나게 되고 이것이 소비를 대신해 경제를 지탱해 줄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IT경기까지 회복된다면 우리 경제는 더 큰 힘을 얻을 것이다.

희망적인 얘기를 추가한다면 과거 경험에 비춰 볼 때 내년만 잘 참고 넘기면 그 다음해부터 소비가 착실하게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갖가지 개혁정책이 나와서 첫해에는 여러 가지 마찰과 갈등을 빚고 기업이나 소비자들도 긴장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음해가 되면 사회가 안정되고 불확실성이 줄어들어 소비가 늘어나게 되는 것 같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의 2차연도에는 민간소비 증가 속도가 각각 10.1%, 8.2%, 11.0%나 돼 전년 증가율을 훨씬 앞질렀다. 특히 1989년에는 성장률이 크게 떨어지는 와중에서도 소비가 대폭 늘어났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위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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