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특수 기억 : 0.001초만의 일도 뇌는 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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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가끔씩 사람들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라고 할 때가 있다.잠깐 사이에 뭔가 생겼다가 사라져 제대로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는 얘기다.

'순식간'이라는 것이 0.01초 정도로 짧아지면, 사람은 아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예컨대 총알이 소리나 바람을 전혀 일으키지 않고서 1m 떨어진 곳을 날아간다면,아마 총알이 지나쳐갔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는 다른,어떤 특수한 기억을 우리 두뇌는 하는 것이다. '단순노출 효과'실험을 통해서도 모종의 특수 기억이 있다는 게 알려졌다. 단순노출 효과란,어떤 것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면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각형·오각형 등 여러 가지 도형을 몇 번씩 보여주고, 나중에 어떤 도형이 마음에 드는지 점수를 매기라고 하면, 사람들은 여러 번 본 도형에 높은 점수를 주는데, 이런 게 단순노출 효과다.

심리학자들은 도형을 사람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0.001초) 동안만 보여줘도 똑같은 단순노출 효과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봤는 지 본인은 모르는데 두뇌는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떤 특수한 기억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1초에 24컷이 돌아가는 영화필름 중에 간간이 1컷씩 광고를 끼워넣는 것 역시 짧은 순간에 일어나 확실하게 인식은 못하지만 두뇌는 영향을 받는 효과를 노린 것일 게다.

기억상실증 환자에서도 특수한 기억의 사례들이 나타난다. 미국에서 간질 때문에 뇌의 일부를 들어 낸 환자가 있었다.H.M.이라는 이 환자는 수술 뒤 예상치 못한 기억상실증을 보였다. 뇌 부분부분의 기능을 잘 몰라 생긴 일이었다.

H.M.은 수술로 인한 기억상실증 때문에 의사를 소개받아도 조금만 지나면 누구인 지 몰라봤고, 이사를 갔는데도 늘 전의 집만 찾아 갔다.

하지만 어떤 특수한 기억 현상은 H.M.이 정상인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실험은 거울 앞에 별이 그려진 종이를 놓고, 거울만 보면서 별모양의 선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이었다<그림 참조>. 거울은 좌우가 반대여서 누구나 처음에는 별을 삐뚤빼뚤하게 그린다. 하지만 이를 몇 번 반복하면,마치 자전거 타는 것을 익히듯 그 요령을 학습해 잘 그리게 된다. 이런 학습에는 기억이 꼭 필요한데, H.M.도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점점 잘 그리게 됐다. 보통의 기억은 못하지만, 특수 기억은 가능하다는 반증이다.

기억상실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단어 연상 실험에서도 특수한 기억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환자들에게 고리·나무·토끼·집·자동차 등의 단어를 보여 준다. 이들은 무엇을 봤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모음 'ㅗ')리'라 쓰인 것을 주고 떠오르는 단어를 쓰라고 하면,'소리''오리''고리''보리' 등 여러가지 단어 가운데 앞서 봤던 '고리'를 쓰는 경우가 훨씬 많아진다.

환자들이 기억을 못한다고 하면서도,'고리'라는 단어를 본 흔적이 두뇌 어딘가에 남아 있어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런 기억을 특히 '암묵 기억'이라고 한다.

암묵 기억이 이뤄질 때의 두뇌 활동은 보통의 기억을 구성할 때와는 다르다. 사람의 두뇌가 특수 기억을 일으키도록 하는 실험을 하면서 두뇌를 기능성자기공명(fMRI) 영상장치 등으로 촬영해 보면, 보통 기억을 할 때와는 다른 점이 나타난다.

보통의 기억은 주로 뇌의 앞부분, 즉 해마나 전두엽이라 부르는 부분들이 많이 관련된 반면,암묵 기억은 뇌의 뒷부분과 관련됐다는 것이 전남대의 연구에서도 확인됐다.

전남대 심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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