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核시인은 對美관계 개선 목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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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이 이달 초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에게 북·미 정상회담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평양 측이 대미(對美)접근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북한의 비밀 핵개발 계획 시인도 결국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카드로 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과의 대화에 소극적인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와 체제보장·경제제재 완화·대량살상무기(WMD)개발 문제 등 북·미 간 현안의 빅딜을 시도하기 위해 던진 '핵개발 시인'이란 극약처방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렸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여기에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나 미국식 협상방식을 잘못 읽은 북한의 안이한 정세판단도 엿보인다.

북한의 핵개발 시인과 북·미 정상회담 제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승부수라고도 할 수 있다. 7·1 경제 관리 개선조치,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 결단을 내린 북·일 정상회담, 지난달 신의주 특별행정구 지정 조치 등 일련의 개혁·개방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미국 측은 북한의 협상태도를 대화 제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의 대화 제의보다는 비밀 핵개발 계획 시인이 1994년 10월의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위반이란 점에 무게를 더 실은 것이다.

북한 측의 제안을 두고 미국도 고심한 흔적은 엿보인다. 켈리의 방북 뒤 북한이 새 핵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미 정부가 발표하기까지 미 정부 내에서 '대토론'이 벌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라크와의 개전 준비에 들어간 사정도 고려했을 것이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악의 축'으로 지명한 이라크에는 전쟁 카드를 빼들고, 북한에는 대화로 나섰을 때의 모순을 저울질했을 수 있다.

실제 이라크는 핵개발을 시인한 북한에 대해 미국이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미국이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는 것은 북한의 메시지가 복합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을 통한 대화 의지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 정부가 북한 측의 진의 파악과 대미 설득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이와 맞물려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 측 태도를 "핵개발로 가겠다"는 것으로 보기 어렵지 않으냐는 것이다. 한·미 간의 대북 온도차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결국 최근 불거진 북한의 핵 문제는 북한의 핵개발 시인만이 아니라 북한의 북·미 정상회담 제안이란 나머지 조각을 끼워넣어야 완전히 맞춰질 수 있게 됐다.

문제는 북한의 제네바 합의 위반이다. 북한이 먼저 핵개발 계획을 없앨 때 북·미 정상회담 제의는 회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현실이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kjy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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