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with] 수줍은 각시? 난 섹시한 색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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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고 쳤네!" 남편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중앙일보 독자체험 '롯데월드 민속 퍼레이드'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한 날은 남편의 휴가 첫 날. 대구로 갔던 우리는 부랴부랴 연습을 위해 서울로 다시 와야 했다. 연락을 늦게 받은 이유도 있지만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게 어디 이번뿐인가. 사실 지난번엔 내가 좀 심했지. 동네 노래자랑에 참가한다는 말을 당일 아침에 얘기했으니. 당황한 남편 얼굴도, 아연실색한 식구들의 표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런 게 삶의 활력 아니겠어.

정리=이진수 기자<rch@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몸은 기억하고 있다

서울에 도착하니 새벽 5시. 얼굴은 초췌하지만 마음은 무척 설렜다. 롯데월드 공연 연습실로 들어서자 안무 지도하는 김선미(25)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바로 연습이란다. 그것도 전통혼례 마차를 타고 수줍어하는 각시 역할이었다.

"누굴 유혹하세요? 좀 부끄러운 척하세요!!"

"허리 그렇게 돌리는 각시 봤어요? 옛 춤은 모두 잊어요."

시작하자마자 김씨의 호통이 이어진다.

스포츠댄스 지도자 과정도 거쳤다. 끼를 억제하지 못해 첫 아이 낳고도 댄스장을 기웃거린 나다. 가무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5분도 안 걸렸다. 모든 자존심이 무너졌다.

하긴 전통 무용 전공한 사람도 한 달 연습해야 무대에 오른단다. 난 겨우 하루 반나절을 연습하니…. 그래도 무너진 내 자존심에 위로는 없다! 아자 아자! 이를 악물었다.

"이제 좀 되시네. 그래도 아직 전통 춤의 단아한 맛이 없어요."

칭찬도 인색하셔라. 내가 봐도 꽤 나아졌는데. 내심 뿌듯하다.

*** 급기야 각본을 바꾸다

벌써 저녁 6시. 내일 공연까지 시간이 별로 없다. 초조해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제자리에서 5회전 하는 장면. 균형도 안 잡히고 머리는 핑핑 돈다. 마지막 고비다. 신랑 역을 맡은 박병철(32)씨는 우아한 발레리노 같다. 역시 프로는 다르네.

"이거 큰일났네. 차라리 각본을 바꿔 이 장면은 아예 생략합시다."

으~ 자존심 상해.

"연습하면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도 겁이 덜컹 난다. 오기로 버티기엔 몸이 안 따르는 걸 직감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가족 여행도 반납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구석에서 혼자 연습하는 모습에 감동했을까.

"그럼 천천히 세 바퀴 도는 걸로 하죠." 김씨의 제안에 자신감이 생겼다. 속이 약간 울렁거려도 참을 만했다. 이게 아줌마의 힘 아니겠어.

저녁 7시 마지막 장면.

"자, 수줍은 듯이 신랑한테 안기세요. 어, 이건 잘하시네"

그럼요, 아줌마도 여잔데 ^^

*** 어머니, 남편, 그리고 아이들

돌이켜보면 작년은 참 힘든 한 해였다.

어머니가 폐질환으로 쓰러지신 건 연말. 지금도 주무실 때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야 한다. 평생 자신의 병을 자식들에게 내색조차 안 하신 어머니. 아버지는 그새 많이도 늙으셨다. 부모님을 보며 가엾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서로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일까. 군의관으로 4월에 제대하는 남편과 요즘 의견 충돌이 부쩍 늘었다. 짜증도 습관이 되고, 해선 안 될 말도 종종 한다. 그만큼 관계도 소원해졌다.

그를 만난 건 12년 전. 서로 말은 안 해도 '이 사람은 내 사람'이란 믿음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이만한 남자 없다고 자신하며 4년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사실 남편도 맘 고생이 많았을 거다. 여기저기 한의원이 문 닫는다는 얘기뿐이고 경제도 어렵다는데 개원하기로 결심했으니. 아들, 딸 바라보며 여기까지 버텨왔는데 남편을 도와주지 못한 거 같아 마음이 아프다.

*** "여보 고마워"

드디어 공연 날.

에구구. 전날 너무 긴장한 탓일까. 늦잠을 잤다. 오전 연습 시간이 조금 줄어들었다. 안무 감독을 맡고 있는 김성근(31)씨가 직접 연습실로 내려왔다. 어제는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영~. 동작도 틀리고 몸도 뻣뻣하다. 초조하긴 감독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이틀 한 거 치면 잘 하시는 거예요. 틀려도 긴장하지 마시고 자신 있게 하세요." 맞아, 틀린다고 뭐 인생이 바뀌겠어. 특유의 끼와 배짱이 꿈틀댄다. '오늘만큼은 내가 주인공. 멋진 프리마돈나가 되는 거야' 주문을 외며 분장실로 향한다. 얼굴이 화사하게 바뀌면서 자신감도 생긴다. 하긴, 내가 화장하고 비녀 꽂으면 전통적인 한국 여성상이라니까.

오후 2시. 퍼레이드 마차 위에 올랐다. 틀려도 활짝 웃었다. 이 순간을 즐기자는 간 큰 생각을 하니 신이 나고 여유도 생겼다. 어, 저기 남편과 아이들 얼굴이 보이네. 여보, 얘들아, 나 예뻐? 평~생 귀여운 아내, 멋진 엄마가 될게. 사랑해.

"여보 고마워. 올해는 좋은 일만 생길 거 같아." 남편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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