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 산실… 잇단 비리 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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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아태재단의 연세대 기증은 청와대 측의 제의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연세대 M·K교수 등이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청와대 측은 재단을 기증하는 대신 金대통령 퇴임 이후 명예연구원 자격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각종 통치사료·비망록 등을 관리할 '김대중 도서관'(가칭) 운영도 조건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연세대 측은 金대통령에게 명예연구원 자격을 보장하는 부분에 난색을 보였으나 결국 이 제안을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金대통령은 큰 짐을 벗게 됐다. 金대통령은 올 초부터 차남이자 재단부이사장인 김홍업(金弘業)씨 등 권력 핵심인사들의 아태재단 관련 비리가 잇따라 불거지면서 여론의 비난에 시달려왔다. 한나라당은 '비리의 온상'이라고 비난했다. 지난 6·13 지방선거 과정에선 민주당 쇄신파도 공개적으로 "폐쇄하라"고 요구했었다.

이때부터 청와대는 '완전폐쇄' '사회환원' 등의 방법을 놓고 논란을 거듭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존폐 여부는 설립자인 金대통령의 결심사항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연구업무가 중단됐고 사실상 폐쇄나 다름없는 상태에 놓이게 됐다.

金대통령은 재단 기증으로 한결 홀가분한 퇴임을 하게 됐다. 동시에 퇴임 후에도 통일·대북 관련 연구 등을 계속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연세대로서도 '대통령 연구에 권위있는 대학'이란 평가와 이미지를 얻게 됐다. 연세대는 이미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연구 계획을 수립해 놓은 상태다. 여기에 아태재단 인수로 김대중 대통령 연구가 크게 유리해졌다.

아태재단도 영욕(榮辱)의 역사를 일단락짓게 됐다. 金대통령에게 있어서 아태재단은 '정계복귀의 발판'이며 '햇볕정책의 산실'이다.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를 떠났던 金대통령은 94년 아태재단을 설립, 정계 복귀에 성공한다. 金대통령은 "퇴임 후 아태재단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남다른 애정과 집착을 보여왔다.

金대통령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아태재단은 'DJ 정치 사조직'이란 구설에 휘말려왔다. 야당시절에는 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자금 문제로 말썽을 빚었다. 현 정권 출범 이후엔 인재를 배출하는 통로, 싱크탱크로 통하면서 인사청탁·이권개입 등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아태재단을 통해 정치권·정부요직에 등용된 경우는 부지기수다. 국정원장·통일부 장관을 지낸 임동원(林東源)대통령 특보, 신건(辛建)국정원장, 나종일(羅鍾一)주 영국대사, 한상진(韓相震)전 정신문화연구원장 등이 아태재단 출신이다.

재단 후원회장인 민주당 최재승(崔在昇)·이강래(李康來)의원, 남궁진(南宮鎭)전 문화부 장관 등이 이곳을 거쳤다.

이런 가운데 이수동(李守東)전 이사는 '이용호 게이트'로, 황용배 전 마사회 감사는 뇌물수수로 구속됐다. 무리하게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수십억원의 부채를 지는 등 부작용도 낳았다.

남은 문제는 아태재단에 관한 金대통령의 영향력 행사 정도와 연세대 내부의 반발 등이다. 무엇보다 실추된 이미지를 되돌려 당초의 목적대로 권위있는 연구기관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정민 기자

jmlee@joongang.co.kr

아태재단 일지

▶1994년 1월 5일 재단법인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으로 외무부 등록. 초대 김대중 이사장, 조영환 사무총장 취임

▶94년 7월 재단 후원회 발족

▶95년 2월 제2대 임동원 사무총장 취임

▶95년 2월 재단법인 '아태평화재단'으로 법인명 변경

▶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98년 2월 제2대 이문영 이사장, 제3대 오기평 사무총장 취임

▶99년 12월 제3대 오기평 이사장 취임

▶2000년 10월 제4대 장행훈 사무총장 취임

▶2001년 12월 동교동 신축사옥으로 이전

▶2002년 2월 이수동 이사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

▶2002년 4월 기구 축소 등 잠정폐쇄 결정

▶2002년 5월 공식 폐쇄

▶2002년 6월 김홍업 부이사장 수뢰 혐의로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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