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압록강·선양에서던지는질문-압록강에뿌려지는눈물 언제나마를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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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풍경 1: 압록강엔 눈물이 더해지고=압록강 너머 요동 벌은 가고 싶지 않은 '오랑캐의 땅'이었다. 만주족 오랑캐! 1636년의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그들은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였고, 그저 '무좀 같은' 하찮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오랑캐 땅을 밟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 처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만주족의 청(淸)은 명(明)을 대신하여 조선의 '상국(上國)'이 되었고, 조선은 해마다 상국을 찾아 황제를 알현해야 했다. 더욱이 그 오랑캐의 땅에는 포로로 끌려간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식들이 붙잡혀 있었다.

1637년 1월, 조선 국왕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높다랗게 쌓은 수항단(受降壇) 위에 거만하게 앉은 청 태종 홍태시(紅泰豕)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홍태시란 '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만주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조선이 태종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인간'이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무조건 항복이었다. 이윽고 홍태시는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들을 이끌고 귀국 길에 오르면서 인조에게서 다짐을 받아낸다.

"내가 데려가는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조선으로 도망쳐 가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졌지만 인구가 부족했던 그들에게 농경 기술이 뛰어난 조선인 포로들은 귀중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던 포로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왔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그들을 붙잡아 선양으로 도로 보내야만 했다. 목숨을 걸고 수천 리 길을 탈출해온 혈육과 다시 헤어져야 하는 처참한 풍경이 빚어졌다. 그렇게 도로 선양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청나라 군인들에게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조선은 눈물에 젖었다. 선양을 탈출하여 압록강을 건너 천리 길을 도망쳐온 혈육들을 도로 보내야 하다니…. 이윽고 청은 '사람 장사'를 벌인다. 혈육을 데려가고픈 조선인들에게 은(銀)을 싸들고 선양으로 오게 만들었다. 선양에서는 정기적으로 '인간 시장'이 열렸다. 하지만 '몸값'으로 은을 구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몸값을 치르고 귀환했던 포로들의 것이든, 몸값이 없어 그저 만주 쪽을 바라보고 통곡했던 이산 가족의 것이든 압록강에는 슬픈 눈물이 더해지고 있었다.

오늘도 압록강은 유장하게 흐른다. 단둥(丹東)을 찾은 여느 한국인들처럼 중국인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압록강 물 위로 보트를 띄운다. 강 건너 북한 땅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다. 실제 보트 위에 서면 강 언덕 저편 북한 동포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문득 베이징(北京)의 '외교 거리'에서 중국 공안원들에게 끌려가는 탈북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도 분명 눈물을 뿌리고 압록강을 건넜을 것이다. 압록강에 뿌려지는 민족의 눈물은 언제나 마를 것인가.

◇풍경 2: 선양에서 던지는 질문=청군에게 끌려가거나 목숨을 걸고 도망쳐오면서 조선인 포로들이 걸어야 했던 길, 몸값을 마련하여 혈육을 데리러 가던 길, 내키지 않지만 청 황제에게 문안을 드리러 조선 사신들이 걸어야 했던 길. 그 길을 따라 나도 걷는다. 변문(邊門), 봉황성(鳳凰城), 초하구(草河口), 연산관(連山關)…. 조선 사신들의 연행록(燕行錄)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시 보니 반갑다. 봉황성을 지나면서 주변 풍경과 산세가 낯설지 않다. 초하구의 도로 양쪽엔 버드나무와 밤나무가 심어져 있고 벽돌집 지붕엔 호박 넝쿨이 흐드러져 있다. 전형적인 우리네 시골의 옛 풍경이로되 가끔 눈에 띄는 '차이나 텔레콤'의 이동통신 중계탑이 달라진 오늘의 모습을 보여준다.

라오양(遼陽)을 지나 이윽고 선양이다. 중국 전체에서 다섯번째로 큰 도시이자 동북지방 최대의 공업도시인 선양. 한때 '동북의 텍사스'로 불릴 만큼 일본·러시아 등 제국주의 침략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선양에도 예외 없이 개혁과 개방의 바람은 찾아들고 있다.

짐을 풀자마자 북릉(北陵)과 고궁(故宮)을 찾는다. 북릉에는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 태종이 묻혀 있고, 고궁에는 당시 잡혀온 소현세자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굴비 두름 엮이듯이 끌려와 '오랑캐'의 처분만 기다려야 했던 포로들의 절망이 눈에 밟힌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사대부의 기개를 지켰던 삼학사(三學士)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청 태종의 무덤에 침이라도 뱉어야 한다." 북릉을 다녀간 어느 한국인 문사가 했던 말이라던가. 3백60여 년 전 포로로 끌려와야 했던 선조들의 쓰라림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조선 사람들은 청 태종을 '홍태시'라 불렀고, 한족들은 "오랑캐의 운수는 백년을 가지 못한다"고 만주족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 오랑캐가 세운 청은 중원을 차지하고, 2백60여 년 동안이나 한족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다. 오늘날 중국이 자랑하는 광대한 영토도 사실은 만주족의 지배 아래서 획득된 것이었다.

'한줌밖에 안되는 오랑캐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들의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사람들은 청의 융성을 이끈 원동력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먼저 꼽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내정은 건전했고, 대외정책은 탁월했다. 누르하치의 여덟 째 아들인 홍태시가 그의 형들을 제치고 황제가 된 것만 봐도 그렇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 아들들은 토의를 거쳐 가장 '능력 있는' 홍태시를 옹립했고, 이후 두말 없이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그리고 그들은 명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열심이었다. 당시 어지럽고 혼란했던 명을 탈출해 많은 사람들이 만주족에게 투항했다. 가렴주구를 못 이겼던 농민과 기술자들, 열악한 대우에 시달리던 병사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낀 지휘관 등등…. 만주족은 그들을 우대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해 농사짓는 기술, 대포 만드는 기술 등 선진 기술을 모두 습득했다.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명을 쓰러뜨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만주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중원을 차지한 뒤에도 고유의 문자를 철저히 지키고, 만주족 본래의 근거지에는 한족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무지막지한 한족들의 동화(同化)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방을 하면서도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그것이 바로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하고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러구러 시간은 흘렀다. 오늘 중국에서 만주족은 소수 민족이 되었고, 한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홍태시도 그저 역사 속의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만주족의 민족적 역량까지 흡수해버린 중국은 이제 세계를 향해 용틀임을 하고 있다. 무시무시하게 밀려오는 중국의 파고(波高)를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넘을 것인가? 선양 북릉의 홍태시 무덤 앞에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한명기 교수 <명지대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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