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방치한 채 기강 세울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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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 임기 말 기강 확립을 위해 공직 사회를 특별 점검한다고 한다. 국가 중추기관의 내부 암투, 고급 정보 유출, 특정 대통령후보에 줄대기가 통제 불능 상태라는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 최고 기밀이 해당 부대장에 의해 폭로되고, 국정원의 도청자료라는 문건이 나돌고, 정치성 짙은 수사를 놓고 검찰 내 알력설이 퍼지는 등 지금의 국정 상황은 혼란과 위기다. 그런 점에서 기강 점검은 임기 말에 당연한 조치의 하나다. 그러나 이번 점검이 제대로 성과를 거두기 힘든 상황이다. 오히려 임기 말 복지부동(伏地不動)풍조만 키울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공직 사회에 우세하다.

왜 이 같은 냉소적 반응이 공직 사회에 퍼져 있는가. 처방이 효험을 발휘하려면 제대로 진단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반발이다. 4천억원의 대북 뒷거래 의혹이 등장한 지 보름 가까이 됐는데도 DJ 정권 핵심부가 이를 방치, 국정 혼선을 자초하고 있는데 기강이 잡힐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군 지휘부에 충성하느니 전역하는 게 낫다"는 감청 부대장의 북한 도발 정보 묵살 주장을 놓고 진실 규명보다 내부 갈등으로 초점을 흐리려는 움직임이 드러나는데 어떻게 바른 기강을 요구할 수 있느냐는 불만이다. 의혹에 얽힌 권력 실세들은'사실 무근'이라면서도 진상 추적에 소극적인데 공직 사회에 영(令)을 세울 수 있느냐는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단순한 이치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공직 기강이다. 권력 핵심부가 국기(國基)와 관련된 사안을 바로잡는 일을 등한히 하면서, 일반 공직 사회에 기강 확립을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거꾸로 공직자들만 닦달하려 한다는 비아냥과 경멸만이 돌아올 뿐이다. 지금 공직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필수적으로 할 일은 거대한 의혹을 파헤쳐 국민에게 소상히 설명하는 것이다. 김석수 국무총리는 인준 통과 뒤 첫 국정 과제인 기강 확립의 성과를 내기 위해선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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