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구 발표후 첫 방문 최완규 교수 방북기下 ] "최고 부자는 화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신의주 세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압록강 여관에 여장을 풀면서 문득 신의주 출신 탈북자 J씨의 말이 떠올랐다. 신의주 연구 때문에 만난 J씨는 올해 1월 필자에게 1980년대 초에 김일성이 "신의주를 개방도시로 만들어야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새벽녘 기적소리에 잠에서 깨니 유선 방송의 스피커에서는 체제선전 소리가 장중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북한 땅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아침 6시쯤부터 주민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신사복 차림에 자전거로 출근하는 모습도 보이고, 무궤도 전기버스·트럭을 타고 가는 사람도 있고 걸어서 출근하는 사람도 많았다. 옷차림새는 평양에 비해 단조로웠다.

우리 일행의 안내자에게 신의주에 있는 락원기계연합기업소나 화학섬유공장, 아니면 화장품 공장이라도 보여달라고 몇 차례 간청했으나 그때마다 거절당했다.'선생들이 신의주에 들어온 사업 목적 이외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신의주를 파격적인 경제 특구로 만들겠다면서 이렇게 폐쇄적일 수 있는가" 라고 필자가 다소 거칠게 항의하자 안내자는 대신 신의주역 인근 본부동에 있는 유치원을 보여줬다.

원생은 3백명 정도이고 아이들의 영양 상태는 좋은 편이었다. 아마 본부동이 주로 당과 행정기관 간부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구 지정 이후 교육내용의 변화 조짐이 있는가 싶어 60세 가량의 여성 원장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교육 내용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3대 장군'(김일성· 김정일·김정숙)을 칭송하는 것이며 조선말이나 산수 교육의 예시도 3대 장군 중심이었다. 특구의 기본법에서 사회분야 교육은 중앙정부 해당기관의 감독을 받게 돼 있다는 점이 특구의 활성화와 연관해서 마음에 걸렸다.

유치원을 떠나려는데 신의주 인근 공장에 투자한 남측 기업인을 대신해 공장 관리를 하고 있는 단둥(丹東) 거주 조선족 P씨, 신의주와 북의 각 도에서 올라온 북측 사람들과 평양에 4년째 거주하고 있는 적십자 국제연맹의 랄프 에크, 세계식량기구(WFP) 관계자, 그리고 취재차 신의주에 온 홍콩주재 서방 기자들을 만났다.

P씨와 신의주 사람들에 의하면 지금 신의주에서 가장 잘사는 사람은 화교들이다. 이들은 과거에는 못살았으나 경제난 이후 자유롭게 단둥을 드나들면서 장사를 해 돈을 벌기 시작했고 신의주에 외부 소식을 전하곤 한다는 것이다.

화교 아들이라고 하면 대학에서도 뒤를 봐준다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남중동과 남서동에 모여 산다.

평양 거주 국제기구 관계자들과 신의주를 취재한 서방 기자들은 특구의 대상 지역인 신의주에 아직 개방을 위한 인프라가 전혀 없음을 강조했다.

이번에 특구 장관이 된 양빈(楊斌) 은 2001년에 중국돈 4천만위안(약 60억원) 정도를 북에 주었고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신의주를 떼어주겠다는 말을 들었다는 소문이 올해 초에 선양(瀋陽)과 단둥 주변에서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개방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개방을 주도하는 권력 상층부와 주민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중간 관료층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나마 소수의 중간관료들도 최근의 빠른 변화에 미처 적응을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고 에크는 말했다. 떠나기 전날 신의주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전화번호부를 찾아보았으나 여관과 혁명사적관·유치원 어느 곳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특구 발표 후에도 외부인에게는 철저하게 통신을 차단하고 있었다. 여관의 프런트 데스크에서 평북일보를 구해준다는 사적관의 안내원한테 전화를 부탁했으나 연결해주겠다는 말뿐이었다.

단둥으로 돌아오기 위해 26일 다시 신의주 세관에 갔다. 여전히 분주했다. 세관 광장에서는 롤렉스 금장 시계(진품)를 찬 북측 사람들도 있었다.

롤렉스 시계를 차고 나무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을 옆 사람이 부러운 듯 쳐다보면서 한번 구경하자고 간청하는 모습도 보였다. 조선국제여행사 버스에는 중국에서 싣고 온 TV 등 전자제품과 일용품이 가득했다.

다시 조중친선 다리를 건너면서 잠시 신의주 특구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비교사회주의 연구자인 그롯스의 지적처럼 사회주의체제의 전환은 점증적 방식보다는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경우가 더 흔하지 않을까.

<경남대 북한대학원 부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