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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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92년 평양을 방문하고 금강산을 돌아보고 와서 나는 북한의 열악한 사회간접자본(SOC)을 감안할 때 남한만의 자본으로 북한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는 민족우선논리가 우세했던 시기였으나 북한에 경제특구를 건설하고 남한이 외국자본을 유치한 경험을 살려 남북한이 합작으로 노하우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중국 경제특구에 일본자본 유치문제를 둘러싼 중국 지도부의 정책대결을 학위논문으로 제출했던 내 눈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였지만, 남북한의 상황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북한이 변화하고 있다. 7·1 경제관리개선조치, 북·일 정상회담에 이은 신의주 경제특구 지정에 이르기까지 1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북한은 얼마나 변화해야 할 것인가.

우선 북한시장의 일부 가격현실화를 취한 7·1 경제관리개선조치는 머지않아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중국이 10년 이상을 걸려 조정기를 거치고 단계적으로 시행했던 개혁조치들을 북한은 한꺼번에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상황이 매우 악화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중국보다 농산물 등 원자재가 태부족인 악조건 아래서 취해진 대담한 개혁조치가 가져올 부담은 외부의 적절한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이다.

다음으로 북한은 외부로부터의 원조와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 왔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미미하다. 지난해에 북한은 유럽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공을 들여왔지만 대테러전쟁을 수행하게 된 미국의 냉담으로 좌절해야만 했다. 이에 북한은 올해 또 다른 승부수를 던졌다.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상대방을 선택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솔직함으로 대화상대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었고 이는 북한의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외자유입의 길을 터놓고 있다. 북·일 국교정상화 논의가 다음달부터 재개되면 어떤 형태로든 자본 투입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희망사항은 북·미 관계개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부시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WMD) 확산방지를 최우선시하면서 아직까지도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개발·수출· 배치를 하지 않겠다는 북한의 명확한 태도를 바라고 있다. 경수로의 주요 시설이 설치되는 2005년 전까지 IAEA 사찰이 완료돼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와 시설 설치가 완료된 후 핵사찰을 받겠다는 북한의 입장 차이는 서로 상대방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뢰 없이는 IMF·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의 외자유치가 불가능해지고, 실질적인 북한 내 경제특구 운용은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북한이 구상하고 있는 7·1 경제관리개선조치의 성공적인 시행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 북한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고, 이는 역내 평화와 안정을 해치게 될 것이다.

북·일 정상회담을 통해 대화 상대방에게 어떻게 하면 신임을 얻을 수 있는지 경험한 金위원장은 부시 대통령에게도 신뢰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북한이 군부 등을 구실로 '전술적 조정'의 눈가림을 한다는 느낌을 상대방에게 주어서는 결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제4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한반도평화를 위한 정치선언'이 채택돼 金위원장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경의선을 달리는 평양행 기차를 타고 10년 전의 평양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비교해 볼 수 있는 꿈이 이뤄지기를 소망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평화와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 모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그 외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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