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러리 감독인가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축구협회가 기본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나를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몰고 있다."

9일 파주 축구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아시안게임 대표팀의 오후 훈련이 끝난 뒤 박항서(사진) 감독이 무겁게 닫아놓았던 입을 마침내 열었다. 그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아시안게임 때까지 무보수로 감독직을 수락했던 것인데 이를 놓고 이상한 말까지 흘러나온다"며 칼끝을 세웠다. 항상 사람좋은 웃음을 흘리던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대표팀을 맡은 지 이제 겨우 한달여.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을까.'박항서호'가 제대로 돛을 올리기도 전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히딩크의 적자(嫡子)'란 후광을 업고 지도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대표팀 감독에 '무혈입성'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히딩크 감독이 지난 4일 내한하자마자 기술고문 계약을 체결하면서 '2004년 대표팀 감독 우선협상권'이란 선물 보따리를 안겨주었다.

게다가 히딩크 감독은 박감독의 데뷔전인 남북통일 축구경기에서 벤치에, 그것도 상석에 앉았다. 일련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박감독은 철저히 소외됐다.

박감독은 "히딩크 감독이 벤치에 앉는 문제와 관련해 협회와 히딩크 감독 본인으로부터 어떤 얘기도 들은 바가 없다"며 불쾌감을 표했다.결국 박감독과 히딩크는 남북경기 때 벤치에서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어색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 뒤에는 '중간평가'니 '한시적 감독'이니 하는 얘기가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축구협회 남광우 사무총장은 8일 "박감독과는 현재 정식 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까지 감독직을 제안했으나 본인이 아시안게임 때까지만 우선 맡고 계속 감독직을 수행할 것인가는 그때 가서 결정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감독은 "협회와 연봉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해 아시안게임을 마칠 때까지 무보수로 일하기로 했다. 정식계약을 미룬 것 뿐이지 2004년 올림픽 때까지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축구협회가 자신을 나무에 올려놓은 뒤 흔들어대는 게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10일엔 아시안게임 대표팀과 청소년(19세 이하)대표팀 간의 수재민 돕기 자선경기(오후7시 서울월드컵경기장)가 열린다. 사전 통보도 없이 갑작스레 만들어진 경기다.

박감독은 "마땅한 인물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감독으로 뽑아라"는 말까지 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감독직에 연연하지는 않겠다는 강력한 항변이었다.

파주=최민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