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 소송 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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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서울은행 등 공적자금이 투입된 6개 은행은 예금보험공사의 지시에 따라 전직 은행장과 임원 등 1백여명에게 1조원대의 부실 책임을 묻는 소송을 이르면 이달 중 내기로 했다. 10년 전만 해도 생각하기 힘든 거액 청구소송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민사소송에서 고액(高額)을 요구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선진국처럼 기업체가 소송에서 지면 엄청난 배상액을 감당하지 못해 경영이 휘청거리는 시대가 코앞에 닥친 것이다.

청구액이 10억원을 넘는 고액사건은 96년 8백65건에서 지난해 2천9백80건으로 세배 이상 증가했다. 전체 민사사건의 소송가액도 크게 늘었다. 외환위기 전인 96년 민사소송의 전체 청구액(항소심·상고심 포함)은 15조3천억원이었지만 98년 29조원을 넘어섰고, 지난해엔 30조9천여억원으로 급증했다.

지난달 말 상고심에서 패해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KT 소액주주 2백27명이 "KT가 주주 이익에 반해 정부에 정보통신진흥기금을 출연한 것은 부당하다"며 4천2백96억원의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

손해배상 청구액이 5조1천억원으로 우리 사법 사상 최대 규모인 고엽제 피해소송 대리인인 백영엽(白永燁)변호사는 최근 항소심 재판부에 인지대 납부를 유예해 달라는 소송구조신청을 내는 보기 드문 현상까지 생겼다.1만7천여명이 미국의 다우케미컬과 몬샌토를 상대로 1인당 3억원씩 손해배상을 청구한 이번 소송은 원고 측이 납부해야 할 인지대만도 2백70억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배경·원인=고액사건이 급증한데 대해 법무법인 CHL의 박문길(朴文吉)변호사는 ▶외환위기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함에 따라 분쟁이 늘어났고▶소비자와 주주들의 권리의식이 커졌으며▶부실을 초래한 금융기관과 기업의 임직원에 대해 철저한 책임을 묻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결함이 있는 제조물을 만든 기업이 관련 피해를 배상하도록 한 제조물책임법이 지난 7월 시행되면서 이 법에 따른 소송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흡연 피해와 자동차 급발진 사고 등은 초대형 소송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업계 대응·부작용=관련 소송이 빈발하자 삼성그룹은 올해 초 구조조정본부에 별도의 법무팀을 설치했으며, LG·현대자동차 등은 관련 인력 확보에 나섰다.

이런 소송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경영진에게 지나친 책임을 묻거나 소송이 빈발할 경우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국가기관이나 검사·공무원들이 언론을 상대로 수억원대의 소송을 내는 것과 관련, 법조계 일각에선 "언론 본연의 기능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지법 한 중견판사는 "시민의 권리의식과 기업의 책임의식이 성장하는 것은 일단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전제하면서 "하지만 지나치게 거액을 청구하는 소송은 분쟁을 더욱 부추길 수 있는 만큼 사회의 타협·조정 기능을 높일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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