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앙코르와트>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神의 궁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앙코르와트 사원이 있는 캄보디아 시엠레아프. 시내에서 앙코르와트로 향하는 길은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흙먼지가 폴폴 날린다. 수풀 속을 빠져나온 달팽이 한마리가 비포장길에 드러난 모습에서 시간이 정지한 느낌, 아니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길을 1천년 전 전쟁터로 향하는 크메르 병사들도 밟았을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제국의 고도(古都)인 앙코르 내에 있다. 크메르는 9~15세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강성했던 제국이다.

12~13세기의 황금기 때는 앙코르 주민이 1백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종 때 한양의 인구가 1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제국의 성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옛 도시에는 앙코르와트 외에 석조 건물이 1백여개에 이른다. 하루 이틀의 일정으로는 '앙코르에 가봤다'고 자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짧은 일정을 아쉬워하며 곧바로 앙코르와트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크메르 제국의 왕들은 저마다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석조 사원을 지었다. 50㎞나 떨어진 곳에서 코끼리와 인부를 써서 돌을 날랐다고 한다.

1992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의 석조물 중 규모나 미적(美的)가치에서 가장 뛰어나다. 12세기 초반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2년)에 의해 37년에 걸쳐 세워졌다. 우주를 관리하고 인간을 구제하는 신인 비슈누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앙코르와트는 힌두교의 우주관을 형상화했다. 정방형의 사원 주위를 감싸는 연못(폭 1백90m, 길이 5.5㎞)은 대양을, 사원의 외벽들은 대륙을 상징한다. 가장 바깥의 외벽은 그 길이가 동서로 1.5㎞, 남북으로 1.3㎞에 이른다.

앙코르와트 앞에선 누구나 그 장대한 규모에 놀란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면 '과연 이것이 인간의 작품일까'하는 신비감에 한번 더 휩싸인다.

사원의 회랑 벽면에는 춤추는 '압살라'(힌두교의 선녀)들이 새겨져 있다. 1천7백50명에 이르는 압살라들은 어느 하나 표정이 같은 것이 없다. 잘록한 허리, 봉긋한 가슴에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지금이라도 돌에서 빠져나와 춤을 출 듯 생생하기만 하다.

사원 중앙부는 힌두교인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메루산(수미산)을 상징한 것이다. 정중앙의 탑 다섯개는 메루산의 다섯 봉우리를 형상화했다. 중앙의 가장 높은 탑은 높이가 65m.

중앙부에 오르는 계단은 경사가 70도에 이른다. 허리를 굽히지 않고서는 감히 오를 수 없다. 중앙부에 오를 엄두를 못내는 관광객들도 있다.

왜 이렇게 가파른 계단을 만들었을까. "힘들이지 않고 천상 세계에 오를 수 있느냐"는 게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다.

계단을 오르면 앙코르의 주변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이곳에서 관광객들은 계단을 오른 보람이 있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나눈다.

크메르 제국이 침체의 길을 걸으며 15세기 프놈펜 인근으로 수도를 옮긴 뒤 제국은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열대 나무들이 석조 건물 안으로 뿌리를 내리며 이 거대한 유적을 뒤덮어 버렸다. 제국이 멸망한 뒤 앙코르는 불교 승려들의 순례지로서만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리고 1861년 프랑스 탐험가 앙리 무오가 밀림 속에서 앙코르와트를 '발견'하고서 세상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1998년 내전이 끝난 이후다. 앙코르의 관문인 시엠레아프에는 호텔과 식당 숫자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2년전에는 국제공항까지 생겼다.

"6년전 이후 두번째 방문"이라는 한 프랑스 여행자는 "그때는 유적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면서 현재의 모습에 놀라워한다.

12월로 예정된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의 콘서트, 그리고 다음달 앙코르와트에서 펼쳐질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패션 쇼. 달라진 캄보디아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소식들이다.

현지인마저 "자고 나면 새로운 건물이 생긴다"고 농담을 할 정도다.

'킬링 필드'(1984년 개봉)이후 이제 캄보디아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는 '툼 레이더'(2001년)다.

'툼'에서 미모의 여전사 라라 크로포트(안젤리나 졸리 扮)가 시공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도구를 찾아내는 곳이 이곳 앙코르다. 이제 이곳 사람들은 '킬링'대신 '툼'을 얘기하고 싶어한다. 시엠레아프의 '레드 피아노'라는 술집에서는 '라라'('툼'의 여주인공)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내놓을 정도다.

햇살이 뜨겁다 했더니 오후 들어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7월부터 10월까지가 우기라고 했던가.

속세로 돌아가는 것은 천상의 세계에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이미 앙코르와트 중앙부의 계단을 내려간 여행자들은 다른 여행자들이 힘겹게 속세로 복귀하는 것을 박수와 환호로 응원한다. 지독한 내전으로 인류사에 남을, 깊은 상처를 맛본 캄보디아인들. 그들은 이제 잠에서 깨어난 소중한 유산으로 전세계인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으고 있다. 앙코르와트 주변에 울렸던 총성은 외벽에 총탄의 흔적들만을 남긴 채 침묵으로 사라졌다.

오후 들어 사위가 서서히 어두워지는데도 관람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에서 정신적 휴식을 취하고 돌아갈 것이다. 갑자기 하늘은 시커멓게 변하며 인근에서 천둥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일순간 소나기가 퍼붓는다. 천년의 유적을 깨우는 빗줄기다.

시엠레아프(캄보디아)=글·사진 성시윤 기자

◇알림=이전의 '길따라 맛따라' 섹션이 '자 떠나자'로 이름을 바꾸어 매주 수요일 선보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