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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소 연합국 수뇌, 전후 처리 위해 포츠담서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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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45년 7월 17일~8월 2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수뇌회담에 참석한 세 거두. 가운데는 트루먼이고, 왼쪽은 총선 패배로 급거 귀국한 처칠을 대신한 애틀리, 오른쪽은 스탈린이다.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소련의 참전 전에 전쟁을 끝냄으로써 동북아 지역을 독점하려던 트루먼의 조기 종전 계획에서 비롯됐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인 1945년 7월 17일.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의 확보로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소련의 참전에는 흥미를 잃었다. 지시마(千島)열도를 소련에 넘기는 조건으로 참전을 약속받은 1945년 2월의 얄타 비밀협정은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의 독점적 이익을 지키는 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다른 무기보다 파괴력이 강한 신무기를 만들었으며 일본이 곧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7월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미국은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언급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소련이 동북아 지역에서 세력을 팽창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7월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 제1호를 투하했다. 조기 종전의 가시화로 동북아에서의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이튿날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은 일본이 목적이 아니라 소련에 대한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미국의 동북아 독점 구상에서 나온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세 과시였다. 그러나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일본을 세력권 아래 두는 대신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두 쪽으로 나누는 비극에 더해 동족상잔의 참극을 빚게 하고 말았다. 동북아 지역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의 힘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지금. ‘은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시대인 하나라에 있다(殷鑑不遠 在夏后之世)’는 옛 경구가 떠오른다. 실패의 역사에서 미래의 교훈을 찾는 ‘징전비후(懲前毖後)’의 안목과 전략에 목마른 오늘. 미·소 두 강대국이 벌인 파워게임의 와중에서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그때의 슬픈 역사가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거울로 다가온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