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개헌, 준비하되 서두르진 말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사실 현행 1987년 헌법은 23년이란 세월을 견뎌왔다. 이전의 헌법에 비하면 상당히 장수(長壽)한 셈이다. 대통령 직선(直選) 단임제(單任制)는 과거 장기집권의 걱정을 털어버리고 안정됐다. 하지만 개헌 당시 정치권이 화급하게 절충을 하는 바람에 손질할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지방화 등 시대적 변화도 반영되지 못했다. 단임제 대통령이 무책임할 수 있고, 일을 하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 다만 국민적 요구와 정치적 절충이라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충분히 무르익었는지는 의문이다.

개헌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국민적 열망이다. 여기에 정치권의 이해가 맞아떨어질 때 개헌이 가능하다. 과거의 개헌은 주로 권력자가 자신의 욕구를 관철하는 과정이었다. 권력구조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꾼 것이다. 겨우 다른 모습을 보인 건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국민적 요구가 폭발해 개헌으로 이어졌다. 그때 국민적 요구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이러한 ‘국민적 요구’가 바뀐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요구가 유효하다는 말이다.

대통령제나 내각제나 민주적 제도다. 운용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경험이다. 우리도 충분한 헌정(憲政) 경험을 쌓아왔다. 그 모든 과정을 깡그리 무시한 채 교과서적 비교로 새로운 걸 꺼내 들고 국민을 상대로 실험할 문제는 아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정치권도 제도보다 운영과 자질 문제라고 지적하는 전문가가 많다. 권형준 한양대 교수도 “현행 헌법이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정치권의 사정은 어떤가.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임기 말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를 추진한 일이 있다. 총리가 실질적인 행정권을 가진 제도로, 사실상 내각제에 가깝다. 퇴임 후에도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는 김종필 전 총리가 내각제를 매개로 연립정부를 세웠다. 직선제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어려운 정치인의 계산이 깔려 있다.

현 시점에서 집권세력이 ‘제왕적(帝王的) 대통령제’를 공격하며 ‘분권형 대통령제’를 꺼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국적 투표에 승산(勝算)이 없거나, 보수대연합에 의욕이 있는 정치인은 내각제나 이원집정제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유력한 차기 후보일수록 반발하기 마련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표적이다. 선거가 빈발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맞추는 개정만 하려 해도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1년을 희생해야 한다.

이렇게 대통령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개헌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차기 주자들에 밀려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 말 ‘원 포인트 개헌’이 실패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특히 임기 후반 분권형이나 내각제를 추진할 경우 집권세력의 의도까지 의심받게 된다. 지난달 한국리서치 조사를 봐도 분권형인 이원집정제 지지자는 8.8%에 불과했다.

개헌은 우리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근본철학이다. 당장의 필요, 정치인의 이해관계로 바꿀 건 아니다. 다수결로 밀어붙일 일도 아니다. 국민적 열망을 업든지, 최소한 압도적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 그럴수록 손을 댄다면 또 다른 이념논쟁의 빌미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전반적으로 손을 대야 한다. 소홀해서도 안 되지만 서두를 이유도 없다. 충분히 논의해 다듬고, 공감대를 넓혀가야 한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