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포스터와 룰렛 테이블, 영화 속 추억 빼곡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6호 08면

카사블랑카로 가는 길은 풍요로웠다. 오른편에는 대서양이, 왼편에는 끝 모를 평원이 내내 동행했다. 아프리카 북서쪽 귀퉁이에 있는 작은 나라 모로코, 그 수도 라바트에서 카사블랑카로 가는 고속도로는 한 시간 내내 여행자에게 그렇게 무한한 풍성함을 선사했다.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찾은 영화 ‘카사블랑카’ 속 릭스 카페

가끔씩 쳐다본 하늘도 끝없이 넓다. 산이 없어 그런지 서울에서 보던 것보다 서너 배는 더 커 보인다. 구름도 풍만하다. 가로수처럼 지나가는 선인장도 커다란 이파리로 팔을 벌린 채 넉넉한 품새를 자랑한다.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과 소 떼들도 풍요로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이따금씩 보이는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 비로소 이곳이 물질적으로 가난한 땅 아프리카임을 깨닫는다.

카사블랑카 시내로 접어든 차는 30분 정도 더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메디나 지역 수르 즈디드 거리에 있는 ‘릭스 카페(Rick’s Cafe)’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주무대다. 15일(현지시간) 저녁 8시를 막 넘긴 때였다.

명화의 현장을 찾았다는 설렘을 누른 채 카페 앞에 차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모든 것이 ‘생소’하다. 영화 속 모로코풍 거리는 간데없고 휑한 대로변에 차렷 자세로 서있는 카페 모습이 황량하기까지 하다.

릭스 카페 안에서 영화가 나오는 TV를 배경으로 여주인과 사진을 찍은 필자.

카페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건장한 청년 두 명이 손님을 맞는다. 그래도 이 카페가 ‘뼈대 있는’ 카페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한번 더 기대가 무너졌다. 일단 너무 좁다. 기둥도 많고. 이 좁은 공간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북적댔단 말인가. 2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이러지, 영화 세트를 찾은 것도 아닌데…. 영화 카사블랑카는 미국 할리우드 세트에서 찍었다. 게다가 만든 지 벌써 70년이 다 된 영화 아닌가.

자리를 정해 앉으니 남자 종업원이 왔다. 그의 이름은 하산 알토페르. 사하라 사막이 고향인 베르베르족이었다. 갸름한 얼굴과 오뚝 선 콧날, 웬만한 조연은 훌륭히 소화해낼 것 같은 잘생긴 얼굴이다. 음식을 주문한 뒤 카페의 내력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 카페가 6년 전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그전에는 시내 중심부 하얏트 호텔 옆에 같은 이름의 카페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카페가 문을 닫으면서 이제 카사블랑카에는 이곳이 유일한 릭스 카페라고 덧붙였다. 68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가 두 세대를 건너뛰어 끊임없이 자신의 분신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불후의 명작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긴 걸까.

식사가 끝날 무렵 여주인 케이티 크리거(65)가 와서 ‘곤방와(저녁에 하는 일본어 인사말)’라고 인사한다. 동양인 중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자주 오는 모양이다. 한국사람이라고 얘기하자 영어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종업원이 못 다한 카페 얘기를 해주러 온 듯했다. 한참 대화가 이어졌다.
그는 영화 속 카페 주인인 험프리 보가트처럼 미국인이었다. 오리건 출신으로 카페를 경영하기 전에는 외교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모로코 근무 중 9·11 테러가 터졌고,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카사블랑카에 눌러앉았다고 했다.

카페를 연 것은 그렇게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왜 영화의 무대인 카사블랑카에 주인공 격인 릭스 카페가 없을까 해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구(舊)메디나 지역에서 바다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오래된 집을 구입했고, 2년6개월간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04년 문을 열었단다.

여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몇 번이나 전기가 나갔다. 불이 꺼지니 그 또한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영화 속 카페 이름을 쓴 것만으로 여행자에게는 모든 것이 용서가 됐다.

카페는 이름을 빼놓곤 영화 ‘카사블랑카’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곳곳에 영화의 흔적을 담으려 애쓴 모습이 역력했다.

입구 벽에는 색 바랜 카사블랑카 영화 포스터가 한 장 붙어 있다. 권총을 든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먼의 얼굴이 클로즈업돼 있다. 카페 한편에는 영화처럼 룰렛 테이블이 갖춰져 있다. 룰렛을 보는 순간 험프리 보가트의 힌트에 따라 22번에 두 번 베팅해 거액을 챙긴 불가리아 신혼부부 얼굴이 떠올랐다. 테이블 옆 TV에는 카사블랑카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주인은 특별한 곳을 보여주겠다며 옥상 테라스로 안내했다. ‘파란 앵무새’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별도의 바가 있는 공간이다. 그는 “지금까지 언론에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파란 앵무새’는 영화 속에서 릭의 경쟁자가 경영하는 카페 이름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개의 카페가 68년이 지나 한 개의 카페로 합쳐져 있는 셈이다. 주인은 그곳에서 “한국에서 온 기자”라며 만나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시켜줬다. 그들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했다. 주인이 주로 단골 손님들에게만 개방하는 공간 같았다.

테라스에서 내려오자 피아니스트와 색소폰 연주자가 귀에 익은 음악을 들려준다. 카사블랑카의 주제곡 ‘세월이 흐르면(As time goes by)’이다. 영화 속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이 옛 애인 보가트를 불러내기 위해 샘에게 연주를 부탁한 곡이다. 이 음악이 나오자 다른 손님들도 미소로 주인에게 ‘고맙다’고 화답한다. 그들 모두 영화의 추억을 찾아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건물 하나 빼고는 영화에 등장하는 콘텐트는 담을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담았다. ‘건물도 좀 비슷하게 만들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장사는 잘된다. 북적이는 손님들로 어느 새 빈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카페를 떠나는 동양인에게 여사장은 기념품을 하나 선물했다. 카페 메뉴였다. 그 위에 직접 자필로 뭔가 써준다.

“Cheers! Here’s looking at you, kid.”
카사블랑카를 대표하는 대사다. 한국에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이라는 말로 번역됐다. 릭(험프리 보가트 분)이 일사(잉그리드 버그먼 분)에 대한 애정을 나타낼 때 즐겨 사용한 이 대사는 2005년 미국영화연구소(AFI)가 발표한 ‘영화 대사 톱100’ 중 5위를 차지했다. 험프리 보가트가 당시 두 번째 영화 촬영이라 긴장하던 잉그리드 버그먼에게 종종 하던 말을 실제 대사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릭스 카페 홈페이지 주소(http://www.rickscafe.ma/)가 씌어 있는 명함도 받았다. 한국에 와서 접속해보니 홈페이지는 열리지 않는다.



모로코와 모나코
모로코에 갔다 왔다 하니 모나코와 모로코가 어떻게 다른지 묻는 사람이 있었다. 모나코는 프랑스의 동남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공국(公國:군주가 아닌 공작이 통치하는 소국)이다. 면적이 세계에서 둘째로 작은 국가로 도박장과 관광 휴양지로 유명하다. 195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미국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56년 이 나라 국왕 레니에 3세와 결혼해 화제를 낳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