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에게 돈 받은 연예인' 사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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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꼭 11년 전 일이다. MBC에서 당시 인기 정상을 달리던 오락 프로그램인 '일요일 일요일 밤에' 연출을 맡고 있었는데 가을 개편을 앞두고 마침 MC 자리가 비게 생겼다.

'개그계의 신사'로 불리던 주병진이 사업에 뛰어든다며 과감하게 사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는 용감했지만 PD는 실로 난감했다. 몇차례 그를 찾아가 선처(?)를 부탁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뒤를 이어 프로를 무리 없이 진행할 거물급 MC 찾기가 수월치 않았다.

녹화를 불과 사나흘 앞두고 고단한 얼굴로 당시 KBS 인기 드라마 '서울 뚝배기'를 보다가 "아, 저 친구"하며 무릎을 쳤다. 최수종이었다. 젊고 유쾌한 캐릭터로 대중에게 신선감과 호감을 주기에 안성마춤이었다.(물론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곧장 거처를 수소문해 과일 바구니를 사들고 최수종이 사는 과천의 아파트로 향했다. 늦은 밤인데다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고, 더구나 장르도 다르고 활동하는 방송사도 달랐지만 '안 한다면 그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무작정 달려갔다.(나도 용감했다.)

기가 차서 웃기만 하는 그를 온갖 달콤한 말로 설득했다.

"드라마 연기를 더 잘하려면 유연성과 순발력이 필요한데 이 프로가 당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풀어줄 거다"라는 식으로 말했던 듯하다. 그 날 결국 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다음날 조간신문의 방송연예면에는 최수종이 방송사를 옮겨 코미디 프로의 MC를 맡는다는 기사가 큼지막하게 났다. PD가 과일 바구니까지 사들고 갔다며 연예인들 섭외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가십성 기사가 등장한 건 그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다.

방송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업이다. PD들이 시청자를 움직이기에 앞서 프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스타)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프로그램 개편 시기가 다가오면 오락PD들은 섭외 때문에 심신이 두루 피곤해진다.

요즘엔 일선 PD보다 부장, 심지어 본부장급이 전화를 해야 스타들이 움직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앞으로 몇 년 후 생길 연예비리의 유형 중에는 'PD에게 돈 받은 연예인 사건'이 있을 거라는 제작진의 자조 섞인 말이 그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런 척박한 풍경 속에도 연예계의 미담 사례가 가끔 주위를 흐뭇하게 한다.

지난 26일 SBS 오픈 드라마 '남과 여'에는 최근 영화계에 거물급 연기자로 안착한 배우 조재현이 등장해 시청자를 놀라게 했다. 배역도 도박장의 게임맨이 아닌 화투부채도사였다.

조재현은 자신이 어려울 때 따뜻하게 대해준 AD(조연출)의 연출 데뷔작이어서 기꺼이 응했다고 말했다. 소위 연예가의 순박한 의리란 이런 모습이다.

스타건 PD건 "나도 왕년에는…"이라고 말할 때 그의 화려한 시절은 이미 간 것이나 다름없다."내가 저 스타를 키웠지"라고 말하는 PD치고 변변한 PD 못 보았다. 스타를 키우는 건 PD가 아니라 대중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본인 스스로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노력과 실천만이 스타의 생명선을 길게 늘리는 비책이다.

대중은 재미를 좇고 스타는 이익을 좇는 것 같지만 그건 겉보기에 불과하다. 재미와 이익은 단기 승부의 부산물일 뿐이다.'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 삶일까'를 고민하고 그것에 대해 희미하나마 해답을 제시하는 인물과 작품만이 진정한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스타는 대중에게 빛을 발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빚을 진 존재다. 그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스타로서의 특권의식을 누리기만 할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의 구현을 위해 몸을 내던져야 한다.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에서 역사 속의 '스타'가 걸어간 고난의 길을 재연하는 최수종을 보며 "참 많이 배우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부러웠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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