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 내가 챙긴다" 당당한 주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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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8면

최근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고백'속의 한 장면.

"내가 번 돈으로 밥 먹고 살면서 무슨 불평이야"라며 아내를 무시하기 일쑤인 남편과 함께 사는 주인공 정희는 자신의 생일에 스스로에게 휴대전화를 사서 선물한다.

아내이자 엄마로서가 아닌 살아 있는 한 여자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이처럼 자신의 생일을 챙기는 주부들이 있다.

주부 박민희(39·경기도 고양시 일산동)씨는 매년 자신의 생일이면 스스로에게 선물을 한다. 박씨가 처음 자신의 생일을 챙기기 시작한 것은 쌍둥이 자녀를 낳고 난 직후 부터다. 일주일 내내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아이들에게 매달려 지내던 그는 자신의 생일을 기다려 화집을 구입했다.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고 20만원이 넘는 화집을 산 것이다.

"아이들과 남편의 것이 아닌 나만의 것이 생겼다는 생각에 정말 기뻤어요. 육아에 지쳐가던 시기였는데 많이 위로가 됐죠"라고 말하는 박씨는 그 후부터 매년 생일이면 벼르고 있던 물건을 사서 자신에게 선물한다.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아닌 박씨가 필요한 물건들로만 산다. 평소 모아두었던 동전 등 자투리 돈을 모아 사용한다.

"매년 생일이 기다려 진다"는 그는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고 챙기는 나만의 생일 선물로 내 생활이 조금 즐거워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주부 진수영(37·경기도 분당)씨도 자신의 생일 선물을 스스로 산다. 아내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는 데 무심한 남편 탓도 있었지만 남들이 사다주는 선물이 성에 안찼기 때문이다. "정말 갖고 싶었지만 빠듯한 생활에 선뜻 구입하기 힘든 물건을 생일날 마음 먹고 산다"는 게 김씨의 말.

김씨에겐 매년 하나씩 샀던 물건들이 지난 세월의 추억을 말해주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맨 처음 집 장만 한 해에 샀던 시계, 첫 아이를 낳았던 해에 샀던 장갑 등은 볼 때마다 행복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추억의 보물창고다.

꼭 생일이 아니라도 자신에게만 완전히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즐기는 주부들도 늘고 있다. 동창회·부녀회 등 다른 사람들과 북적거리는 모임이 아닌 온전히 홀로 즐기는 시간이다.

주부 이은주(38·서울 서초구 송파동)씨는 한달에 한번씩 혼자서 재즈 바에 간다.처음에 남편과 같이 갔지만 관심 없어 하는 남편의 모습에 차라리 혼자 가기로 마음 먹었던 게 계기가 됐다.

그후로 매달 한번 저녁 때 혼자 맥주를 홀짝거리며 재즈를 듣는 게 그의 즐거움이다. 라이브 공연이 펼쳐지는 날엔 밤 12시를 넘기면서까지 음악에 열광한다. 그런 '엄마의 날'을 아이들과 남편도 밀어준다.

이씨는 "정신적 허영, 문화적 사치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 만큼은 남들에게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며 "이유없이 행복하고 가슴이 확 뚫리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남편의 월급날이면 아파트 관리비, 각종 세금, 아이들 학원비 내기에 바쁜 게 보통 주부들의 경우지만 박복남(52·서울 성동구 행당동)씨는 조금 다르다. 꼭 읽고 싶었던 책과 듣고 싶었던 음반을 하나씩 산다.

"남편의 월급날은 나의 월급날이기도 하다"는 게 그의 주장. 그에게 있어 서점에 가서 내 책을 고르는 동안 느끼는 풍요로움은 한달치의 고생을 모두 날려버릴 만큼 강력하다.

결혼 직후부터 꼭 지켜온 그의 원칙 덕분에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박씨에겐 자신만의 책장을 만들 만큼 책들이 모였다. "일년이면 책과 음반이 각각 열두개가 된다"며 "빠듯한 생활비에 따로 나만을 위한 돈을 쓰는 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이런 일을 통해 바쁜 일상에 파묻혀 버리기 쉬운 나 자신을 돌아보곤 한다"고 말했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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