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경숙 '달의 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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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사랑보다는 핏줄. 신경숙 또래의 많은 여성 작가들이 사랑과 불륜, 이혼과 성담론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신경숙은 여전히 가족과 핏줄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신경숙의 그 이야기는 너무 절실하고 구체적이어서 보는 이의 가슴 한 부분을 저리게 만든다. 이를 신경숙의 가족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 발표된 그녀의 출세작 '풍금이 있던 자리'는 한 시골 출신 처녀와 유부남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지만, 그 핵심에는 불륜 혹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파괴되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10여 년이 흘러 발표된, 황순원 문학상 후보작인 '달의 물'에서는 신경숙의 도도한 가족주의가 훨씬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화자(話者)는 노처녀 약사. 연로한 부모님은 시골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모두들 떠나가는 시골에 혼신의 힘을 다해 집을 지었다. 그로 인해 병을 얻고 의사로부터 금주명령을 받은 상태.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술을 숨겨놓고 마신다. 어머니는 딸에게 아버지의 음주를 고자질하고 딸은 다른 상담거리를 들고 시골집을 찾아간다. 마침 오빠도 그날 여섯 살짜리 조카를 시골집에 맡겨두고 떠나간다. 소설 말미에서 밝혀지지만 오빠는 막 이혼한 상태. 나중에 조카가 사라지는 소동이 벌어지는데, 조카는 옥상 위의 큰 항아리 속에서 술에 취해 잠든 채로 발견된다. 아버지가 술병을 숨겨놓은 항아리에 아이가 장난삼아 들어갔다가 술을 마셔버렸던 것이다.

신경숙은 이 소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도 큰 위기가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가령 어머니는 사나운 고모가 미워서 시집온 지 얼마 안되어 친정으로 달아났다. 아내를 데리러 간 아버지는 처가 문틈에서 새어 나온 "인자 내 집은 그집이요, 시누이가 호랭이 같이 무서워 그리요. 얼매나 싸우는지…. 며칠만 있다가 갈라요"라는 말을 듣고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버지 역시 동네 점방의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돈 오십만 원을 신문지에 싸서 문설주에 끼워놓고 도망가는 용의주도함을 보여주었다. 그 용의주도함은 최소한 처자식의 생계 문제만큼은 방치하지 않겠다는 가부장적 태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빠의 이혼이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오빠의 이혼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다만 핏줄의 강렬함을 이야기한다. "아버지보다 칠십 년은 늦게 태어난 동이를 옥상에서 업고 내려와 방에 누이자 동이가 어느새 이마에 오른팔을 얹었다. 곧 오른발을 왼발에 꼬았다. 아버지와 똑같은 자세였다. 이 기이한 느낌을 뭐라 할 것인가." '이 기이한 느낌'이란 바로 핏줄의 동질감의 확인에서 오는 감동 같은 것이다. 이것은 비록 원시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뿌리치기 힘든 것이다. 이 소설 다른 곳에 등장하는 주거 환경의 변화, 환경오염 문제, 농촌의 피폐상 등은 이 소설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90년대 초반에 신경숙이 어렴풋이 '사랑보다는 가족이야'를 중얼거렸다면 이제 신경숙은 '사랑보다는 핏줄이야'를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혹자는 신경숙의 이런 태도를 보고 구시대적 이데올로기라고 폄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랴. 신경숙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하응백<문학평론가>

<약력>

▶1963년 생

▶85년 『문예중앙』에 '겨울우화' 당선돼 등단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외딴 방』『바이올렛』 등

▶한국일보문학상·현대문학상·만해문학상·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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