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사각지대정부산하단체]몇 개인지 뭘 하는지 정부도 몰라(上)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개혁의 사각(死角)지대인 정부산하단체의 개혁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거세다. 기획예산처가 제정 중인 '정부산하기관 관리기본법'이 관련 정부부처들의 반발에 부닥쳐 자칫 표류할 위기에 처했다. 또 산하단체들은 정권 말기를 앞두고 증원과 부서 신설을 앞다퉈 요청하는 등 몸집 부풀리기에 나서 개혁의 발목을 거세게 붙잡고 있다.

기획예산처 고위 관계자는 13일 "정부 부처들의 반발로 올해 정기국회에 상정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정부는 당초 8월 중 입법해 국회에 상정할 예정이었다. 법안 내용도 수정을 거듭하면서 크게 후퇴하고 있다. 가령 5월 중 만들어진 초안에는 "산하단체 신설시 주무부처는 기획예산처와 사전 협의해야 한다"고 돼 있었지만 7월 중 수정안에는 사전협의 부분이 제외됐다. 다른 관계자는 "수정안에 있는 외부감사 의무조항도 조만간 빠질 것"이라면서 더 완화될 것임을 시사했다.

산하단체 개혁은 YS정부 이래 10년째 과제지만, 이처럼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다. 정부 돈을 안쓰고 국민 부담이 없다면 문제될 것 없다. 그러나 산하단체는 정부 예산을 많이 쓴다. 1998년 현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산하단체는 6백12개, 정부지원금은 4조3천억원이라고 밝혔다. 또 정부 업무는 대부분 이들 단체에 위임돼 있다. 기업과 국민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회비나 수수료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인수위원회는 당시 이런 돈을 합쳐 산하단체가 쓰는 돈은 연간 1백3조원으로 정부 예산보다 많다고 밝혔다.

◇기초자료도 없고, 감시도 안돼=산하단체는 블랙박스다. 대체 몇 개나 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가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 산하단체 개혁을 추진하는 기획예산처 관계자도 "수가 얼마나 되는지, 기능은 무엇이며 정부는 얼마나 지원하는지 등을 정확히 모른다"고 밝혔다. 산하단체 개수는 전문가마다 다르다. 기획예산처 김경섭 정부개혁실장은 "가령 지난해는 지원받았지만 올해는 지원을 안받는 단체를 포함해야 하는가"라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98년 초 인수위원회는 6백12개, 이화여대 송희준(행정학)교수는 7백여개로 추산했다. 전경련은 정부 업무를 위임받는 협회나 조합 등을 포함하면 수천개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산하단체의 기능 파악이나 감시·통제는 더욱 안되고 있다. 공기업 등 규모가 큰 일부 산하단체는 감사원이나 국회 감사를 받지만, 나머지 산하단체들은 대부분 감사를 받지 않는다. 주무부처의 산하단체 경영평가도 형식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김준기 교수는 "'자기 식구'인데 주무부처가 제대로 평가할 리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해 안되는 산하단체 수두룩=조석준 행정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는 "50~60년대 산물인 석탄공사나 광업진흥공사 등이 지금껏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석공에 3백억원, 광진공에 1백59억원을 출자 중이다. 전경련 신종익 상무는 "장애인용 편의시설 설치 목적으로 설립된 편의시설설치 촉진기금은 개점휴업인데도 정리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민간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에 정부가 44억여원을 재정지원하면서 굳이 산하단체로 두고 있거나▶정보통신부가 우체국 직원에게 돈을 빌려주는 별정우체국연합회를 거느리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는 의견도 있다. 존재 이유가 별로 없는 산하단체 때문에 세금과 인력 낭비가 심하다는 주장이다.

◇'내 식구' 감싸기와 퇴직 후 밥그릇 때문=산하단체 개혁은 YS정부 때부터의 정책과제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동은 현 정부 들어서다. 산하단체 개혁을 '1백대 정책과제'에 포함시켰고, 정부산하기관 관리기본법도 제정하기로 했다. 기획예산처도 98년부터 2백여 산하단체를 경영혁신 대상기관으로 지정해 경영혁신을 점검하고 있다. 그러나 경실련 관계자는 "기업·금융개혁이나 정부조직 개혁에 비해 구조조정이 상당히 미흡했다"고 지적한다. 관리기본법도 5년 동안 허송하다 지난 5월에야 초안이 나왔다. 그나마 다른 정부부처 반발로 수정을 하면서 후퇴하고 있다. 가령 초안에는 기획예산처가 산하단체를 평가할 수 있도록 했지만, 수정안에서는 주무장관이 평가하도록 바뀌었다. 내용이야 어찌되든, 올해 제정됐으면 하는 게 기획예산처 관계자의 바람이다.

이에 대해 宋교수는 "정부 부처와 산하단체가 한통속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전경련 申상무는 "정부가 겉으론 '작은 정부'를 내세우면서 실제론 업무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산하단체를 설립한다"고 강조했다. 趙대표는 "공무원들이 퇴직한 뒤 갈 자리인데 개혁할 리 있는가"라고 강조했다. 낙하산 인사를 없애려면 산하단체부터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영욱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