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멸(絶滅)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인류가 절멸한 뒤의 지구가 무인(無人)의 산맥과 무인의 바닷가를 거느리고 광막한 우주 공간을 무서운 속도로 돌고 있는 이미지를 좋아한다."
허만하 시인이 쓴 '사람이 사라져버린 산맥과 바닷가'의 풍경을 이 휴가철에 찾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산과 바다는 도시에서 허겁지겁 바캉스를 보내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로 붐빈다. 그 붐빔은 몸살이나 열병처럼 이 산하를 휩쓸어 버린다. '바캉스'라는 프랑스 말의 본뜻이 '텅 빔'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의 여름 휴가는 거꾸로 일상에서 박탈당하고 살았던 걸 한순간에 꾸역꾸역 채우려는 몸부림처럼 비친다.
하지만 이 여름에도 '절멸'에 가까운 모습으로 의연한 땅이 있다. 독도다. 울릉도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92㎞를 가야 나타나는 독도는 이미 그 이름에서 고고함을 풍긴다. 외로운 섬, 고독한 섬 독도의 쓸쓸함은 슬픔으로 번져간다. 세상 끄트머리로 뻗치거나 오지로 숨어든 것들은 슬프다.
이왈종씨가 수묵담채로 그린 '독도 진경'은 한여름에도 혼자서 놀고 있는 독도의 그 호젓함을 진진하게 담았다. 어렵게 독도에 가닿은 화가는 "첫 눈에 이 섬에 반해버렸다"고 했다. "참 잘났다"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오더라는 말 끝에 화가는 "독도의 풍경이 내 속으로 스며들어 손에 든 붓을 꿈틀거리게 하더라"고 털어놓았다. 단숨에 가슴을 치고 들어온 독도와의 대면에서 화가는 온 몸이 텅 비어버리는 걸 느꼈고, 그 에너지로 '독도 진경'을 시원스레 쑥 토해냈다.
탕건봉과 삼형제굴·촛대바위를 거느린 서도의 우람함을 단순한 선 몇 개로 잡아낸 화가는 그림 안보다 밖에 더 큼직한 여백을 풀어놓았다. 그 여백은 '독도 진경'을 만나는 사람의 풍경이다. 보는 이가 이 그림 한 장으로 번잡하고 뜨거운 여름을 가뿐하게 이겨내길 바라는 화가의 마음이 이성복 시인의 '바다'를 소리없이 읊었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나는 달아나지 않고/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눈앞을 가린 소나무 숲가에서/서러움이 숨고/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흰 물거품 입에 물고/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정재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