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 부메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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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호주 원주민들의 사냥도구로 '부메랑'이란 것이 있다. 부메랑은 표적물을 명중시키지 못하면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특징이다.

'장상'이란 사냥감을 향해 일제히 부메랑이 던져졌다. 사냥감이 쓰러지긴 했지만 사실은 빗맞은 것이었다. 부메랑을 던진 사람들이 노렸던 목표는 '부결'이 아니라 '긴장을 줄만한 선에서의 통과처리'가 아니었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젠 표적을 비껴 맞고 되돌아오는 부메랑을 피하려고 어제까지 '소신있는 자유투표' 운운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네탓 공방'을 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발단은 역시 제대로 사전 검증도 하지 않고 그저 "이런 건 처음봤지"하는 식으로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현수막을 내걸며 장상 카드를 들이댄 김대중 대통령의 얄팍한 처사에 있었다.

金대통령이 진심으로 여권신장과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해 여성총리를 제안할 요량이었다면 정권 초기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다.

정권 끝물에 와서, 그것도 국회에서의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를 다분히 의식한 술책의 냄새를 풍기며 여성총리 카드를 내놓은 것 자체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용한 것이고 여성을 존중한 것이 아니라 기만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더구나 장상총리서리 부결 이후 새 총리를 물색하는 과정에서도 우선적으로 여성총리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는데 총리직을 두고 여성·남성 가름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의미의 차별이다. 총리는 총리일 따름이다.

더구나 지금은 여성총리의 시대적 대의명분을 고집할 때가 아니라 7개월 남은 국정을 더 이상 만신창이로 만들지 않고 12월 대선을 조화롭게 치러낼 엄정 중립의 관리내각이 필요한 때다. 괜한 오기를 부려서는 정말 곤란하다.

아울러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이번 장상씨의 총리인준 부결이 결코 '최초의 여성총리에 대한 거부'란 의미로 해석돼선 곤란하다는 점이다. 즉 우리사회가 여성들의 최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이른바 '유리천장(glass ceiling)'으로 뒤덮여 있는 사회라는 방증으로 쓰이기엔 이번 사태가 결코 적절한 예가 못된다.

왜냐 하면 장상씨의 총리인준을 위한 국회청문회를 지켜본 대다수의 국민들이 느꼈던 허탈감은 그 대상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상씨의 책임회피와 그 방식이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즉 위장전입 건을 늙은 시모에게 떠넘기고 학력관계 서명여부를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충직해보이는 옛 비서한테 책임회피했다가 번복하는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고개를 가로 저은 것이다. 부표를 행사한 대부분의 국회의원들도 이런 분위기와 여론의 동향을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이회창 대통령후보를 위시한 한나라당 지도부가 장상씨 총리인준 부결에 대해 음모론을 제기한 것은 적절치 못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상대방의 음모이기 전에 자신의 정치적 집중력 부족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축구에서도 경기 집중력이 떨어지면 골을 먹지 않던가.

좀더 집중력있고 정교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지도부였다면 장상씨를 총리직 문턱에서 그냥 낙마시켜 국정공백 논란을 야기하고 정국을 급랭시키기보다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인준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국민 대다수의 경고의사를 청와대와 행정부에 긴장감있게 전달하면서도 쓸데없이 가파른 정치적 대립각은 피한 채 정국 주도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아마 전성기의 YS였다면 동물적인 정치감각을 발휘하며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당론이니 자유투표니 하는 말에 구애받지 않고 직접 표점검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李후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성계의 동향과 민심만 곁눈질하고 저울질하다 정작 더 큰 정치적 구도를 읽지 못하는 우를 범한 셈이다. 그 대가로 李후보는 대선이 끝나는 날까지 '장상 부메랑'에 시달릴 것이 틀림없다. 이래저래 바람 잘 날 없는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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