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가르치는 지하철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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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구려나 선사시대의 동굴·고분벽화를 보면 눈이 부셔요. 비잔틴 미술의 최대 걸작품도 터키 암흑교회의 지하실에서 완성됐고요."

서울시청 시장실 앞에 걸린 40호짜리 북한산 풍경화는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김용범(49·사진)역장의 작품이다.

그는 미대 진학에 실패한 뒤 화가의 꿈을 접었지만 지난 30여년 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다.

金역장은 5년 전 지하철 승객을 보면서 자신처럼 미술의 꿈을 이루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림교실'을 열었다.

이후 옮겨 다니는 역마다 시민들을 모아 무료로 데생과 유화를 가르쳐온 金역장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석고상·이젤·의자를 장만해 왔다.

지난 5년 간 김역장의 그림교실을 거쳐간 시민은 7백50명. 지금도 매주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시민 45명이 수락산역 지하1층에서 하루 두차례(오전 10~12시·오후 2~4시) 그림공부를 한다. 학생 가운데는 1998년부터 인천에서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니는 김정의(79) 할아버지도 있다.

金역장은 "막상 문을 열고 보니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며 "힘 닿는 대로 삭막한 서울의 땅밑을 훈훈한 예술공간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02-930-0871.

박현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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