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정상외교 통역생활 14년 마감 이영백 공사참사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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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駐中) 한국대사관의 이영백(李英百.59) 공사참사관은 중국인들에게서 "우리보다 중국말을 더 잘하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부친 때문에 중국 우한(武漢)에서 태어나 한국의 화교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대만에서 유학했다. 1991년 외교부에 특채돼 탁월한 중국어 솜씨로 한.중 수교 비밀 협상부터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대중(對中) 정상외교 통역을 담당했다. 이제 14년의 외교 업무를 뒤로하고 1월 1일 정년 퇴직한다.

이영백 공사참사관이 지켜본 한.중 정상외교의 현장들. 그는 "중국 사람들 생각이 깊다는 것은 잘 아시잖습니까. 속 꿍꿍이가 많아 즉흥적인 한국인들이 당하기 십상이지요. 외교 현장에서도 이런 점이 가끔 나타납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중국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회담에 임하기 전 철저한 준비를 하고 나온다"고 말했다. "겸손하고 부드러운 인상도 한결같지만 준비만큼은 모두 철저해 회담에 필요한 수치와 주제 등을 모두 사전에 숙지한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방중했을 때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의 회담이 그 예다.

원 총리는 노 대통령의 저작을 밤새 읽었다면서 구체적으로 몇 페이지 어느 대목을 열거한 뒤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털어놓더라는 것. "원 총리는 한 술 더 떠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 시집을 읽었다'면서 즉석에서 시구를 낭송해 참석자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소개했다.

가장 강력한 인상을 주었던 지도자는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김대중 대통령의 방중 때 대통령의 5개 사항 협력 제안을 메모 없이 들은 뒤 만찬 석상에서 이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순서대로 되풀이하는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은 회담 직전 통역을 불러 산책까지 함께하면서 회담을 준비한다. 그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중국 고시(古詩)를 미리 준비한 상태였다. 이를 통역이 사전에 숙지해 현장에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하자는 준비 작업"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대부분의 중국 지도자는 정상회담 전 의제 설정 단계에서부터 통역을 참석시켜 자신들의 정확한 의도와 뜻이 상대방에게 전달되도록 준비한다고 그는 소개했다.

리펑(李鵬) 전 총리는 회담 전 모든 상황을 다시 점검하면서 통역의 옷차림까지도 챙긴다.

"통역의 옷차림이 초라하면 즉석에서 양복 값을 주면서 '빨리 옷 하나 해 입어라'고 지시할 정도"란다.

이 공사참사관은 "이에 비해 우리는 정상회담 직전까지 통역이 대통령을 만날 수 없다"며 "대부분의 경우 시작 5분 전에 사전 원고를 받았다"고 지적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만이 한.중 정상회담 직전 자신을 불러 "내가 말을 잘하지 못하니 통역을 잘해 달라"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 것이 예외였다고 그는 덧붙였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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